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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조선을 거울 삼아 개혁 성공시켜야

2023-01-27 (금) 오현환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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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마치 오래 손보지 않은 1만 칸의 큰 집처럼 옆으로 기울고 위로는 빗물이 새고 대들보와 서까래는 좀이 먹고 썩어서 간신히 아침저녁을 넘기고 있습니다.”

율곡 이이는 16세기 후반 붕괴에 직면한 나라의 개혁을 요구하는 상소를 끊임없이 선조에게 올렸다. 조선이 개국한 지 200년이 지나 나라가 전반적으로 성한 곳이 없었다. 하지만 당시 조정에서는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시 농민들은 특산물을 현물로 납부해야하는 공납의 폐단으로 몇 배나 비싼 값에 방납인들로부터 사서 바쳐야하는 고통을 겪었다.

율곡은 특산물 대신 쌀로 내되 가구원 숫자보다 보유한 토지만큼 내는 수미법(收米法)의 도입을 주장했다. 가난한 농민은 세금이 줄고 토지가 많은 지주는 세금이 늘어나 재정도 개선되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율곡은 또 “미리 군병을 양성해 대비하지 않으면 10년을 지나 땅이 무너지는 화가 있을 것”이라는 상소를 왕에게 올리며 10만 양병설을 펼쳤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이 반발하고 지지 세력은 약해 그의 주장은 빛을 보지 못했다. 율곡이 세상을 뜬 지 불과 8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국토가 쑥대밭이 됐다.


율곡의 수미법은 광해군 대에 ‘대동법(大同法)’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에 도입돼 인조 때 강원도, 현종 때 충청·전라, 숙종 때 경상·황해도로 확대되는 등 100년이 걸려 정착됐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섰고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 시대가 열렸다. 조선이 동아시아 전쟁터가 됐으면서도 왕조 붕괴 없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이 대동법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급변하는 세계사 속에서 근본적인 개혁을 이루지 못해 다시 일제에 나라를 통째로 잃는 고통을 피할 수 없었다. 조선의 붕괴는 개혁의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됐음에도 정치권이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새해에 노동·연금·교육·공공·서비스 등 강력한 구조 개혁 추진 의사를 밝혔다.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와 세계 최하위 수준의 노동 유연성, 기금 고갈이 멀지 않은 연금 재정 문제는 알면서도 고치지 못한 우리 시대의 불편한 진실이다. 수도권 규제에 묶여 대학 첨단학과 정원을 늘리지도 못하고 초중고생은 줄어드는데 내국세에 연동돼 늘어나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 문제도 마찬가지다. 고용 창출의 보고 역할을 할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의 국회 방치, 문재인 정부 시절 공공 부문의 비대화 문제도 고질적인 개혁 과제다.

중국의 인구가 지난해 감소세로 전환하며 중국 경제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는 ‘차이나 피크’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인구절벽의 폭풍은 우리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와 있다. 15∼64세의 생산연령인구는 이미 2017년에, 전체 인구는 2020년에 감소세로 돌아섰다. 이대로 경제 구조를 방치할 경우 잠재성장률 하락으로 국민 경제가 흔들릴 수 있다. 복지 수요는 가속도를 내는데 세금을 낼 인구는 줄어 청년층이 짊어져야할 부담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이번에 개혁에 실패하면 ‘잃어버린 30년’의 터널 속을 헤매는 일본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재정 위기로 만성 질환에 시달리는 남유럽의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른다. 임진왜란 이후 대동법이 성공적으로 뿌리내리게 됐던 것은 이원익·김육 등이 앞장섰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백성들 속에서 민심을 몸소 체험하며 끊임없이 논의하고 반대자들에 대한 설득을 포기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조선의 개혁 실패를 거울삼아 구조 개혁의 시대정신을 깊이 새기고 이행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다져야 한다. 정부 여당은 개혁의 절실함, 방향을 국민에게 자세히 알리고 반대자, 기득권 세력에 대한 설득 노력을 끊임없이 펼쳐야한다. 거대 야당은 지난 집권 시기의 실패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기로에 놓인 나라를 되살리는 데 적극 협조해야 한다. 개혁의 실패로 나라를 잃었던 과거를 되새기며 구조 개혁을 성공시켜 선진국으로 나아가야 한다.

<오현환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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