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기술로 무장된 우리는 인류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힘을 지니고 삽니다. 유발 하라리의 ‘신이 된 인간’이라는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전에는 신의 영역으로 분류했던 많은 분야에서 우리는 과학으로 지구와 우주와 생명의 물리적 현상에 대하여 이해하고 또 기술로서 그 편리함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과거의 어느 왕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문명의 편리함의 이면에는 마찬가지의 힘으로 우리를 파괴하는 힘이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자연자원을 파먹기만 하고 돌려놓지 않은 우리의 행동은 ‘우리 모두의 공동의 집’, 지구로 하여금 생명이 살 수 없는 재앙의 조건을 만들어왔습니다.자연을 정복하여 풍성한 번식을 할 수 있었기에 우리 스스로가 붙여준 이름 사피엔스는 스스로를 재앙 속에 가두는 바보스러움이 있었음을 몰랐습니다. 탄소입니다. 지구의 탄소 순환 시스템 속에 탄소를 너무 많이 집어넣어왔습니다. 탄소는 하늘과 바다와 산과 생명 속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균형을 이루며 순환합니다. 오늘의 재앙을 가지고 온 원인은 고체화되어 지하에 묻혀있던 탄소들 즉 석탄, 석유, 천연가스를 태워 탄소사이클 속 대기 중으로 지속적으로 배출해온 것입니다.
파리기후협약이 그 어느 때보다도 성공적이었지만 참가국들이 약속한 탄소감축목표량 모두를 합산해도 세기말 지구 기온은 산업혁명 이전보다 7도 상승하게 합니다. 인류 사회는 2도 이상의 지구환경에서 지탱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7도 상승된 지구 환경에서는 어떤 형태의 사회 형성조차 불가능 합니다. 인류 사회가 견딜 수 있는 마지막 온도는 1.5도 상승입니다. 이것은 파리기후협약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7도와 1.5도, 이렇게 턱없이 넓은 간극을 어떻게 메워야할까요? 인류가 이것을 메울 의지나 있는지요?
이 황망한 미래를 살아야 할 내 자식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과학의 예견대로 기후가 요동쳐서 폭풍과 홍수, 가뭄, 산불, 등이 일상이 되어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항시적 유목민이 될 지도 모르는 그러한 세상이 산업혁명 이후에 태어난 우리 베이비부머세대가 만든 우리 자식들의 세상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세상 속으로 우리 자녀들을 내던지며 살아왔습니다. 그 세상은 전에 경험한 적이 없기에 머리 속에만 있습니다. 솔직히 이러한 세상을 정면으로 대할 심리적 근육이 없습니다. 다만 두려움이고, 설마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뿐입니다.
어떻게 하나요? 그냥 세상의 종말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아니면 ‘나는 그때까지 살지 않을테니 나 죽으면 그만이지’ 할까요? 아니면 ‘나는 신앙이 돈독하니 예수님이 우리를 기후변화에서 구원하려 오실테지’ 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읽을까요?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서 그런 세상을 살 게 될 것이라는 것을 배울 때 그들의 심리상태는 어떨까요?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때 뭐하셨어요?”하고 물으면 무어라 대답할까요?
둘러보면 기후변화를 극복할 자원과 기술은 이미 충분합니다. 우리에겐 자본도 있습니다. 자본으로 할 수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식들의 미래보다는 자본을 더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신재생 에너지 생산가격은 이미 기존의 화석연료 에너지보다 낮습니다. 청정기술로 탄소감축을 이룬 회사들이 그 크레딧을 팔수 있는 탄소시장도 세계 곳곳에서 열립니다. 환경운동가와 어린이와 학생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고 세계의 나라들이 탄소감축을 위한 정책을 내놓습니다. 문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많이 잡아야 10년입니다. 그러나 10년이라고 얘기한 것이 몇 년 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당장 시작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은 우리 자신을 바꾸는 일입니다. 우리가 신봉해온 철학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다’라는 인본주의를 나와 사회, 지구, 우주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생태계를 관리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 생각하는 동물이다”라는 새로운 인본주의로 개선되어야합니다. ‘나는 지구 생태계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나의 삶과 죽음은 다른 생태계의 생명체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되는지’ 등의 사유가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이 질문들은 철학적 사유를 넘어서 우리들의 생존을 결정하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세대적 의무입니다. 기후환경위기를 사유하고 내재화하여 그 해결 방법을 우리의 일상 속에서 찾아가야 할 의무 말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이 세대야말로 기후변화라는 위기를 초래하고 또한 이 위기로 죽어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입니다.
<
김은영 기후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