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튜링은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천재의 한명이다. 컴퓨터 공학의 기초를 놓아 ‘컴퓨터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붙었고 미래 산업의 핵심 요소인 인공 지능(AI)도 그로부터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2차 대전 중에는 절대로 풀 수 없다는 독일군의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해 영국의 승리에 기여했다.
이런 인물을 영국 정부는 1952년 동성애법 위반 혐의로 기소해 징역과 화학적 거세 중 선택을 강요했고 그는 화학적 거세를 선택한 후 2년 뒤 41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그 후 55년이 지난 뒤 영국 정부는 공식 사과했고 2013년 엘리자벳 2세는 그를 사후 사면했다. 2017년에는 ‘앨런 튜링법’이 제정돼 동성애법 위반 혐의로 처벌받은 사람은 자동적으로 사면받게 됐다.
동성애가 서양에서 늘 이처럼 죄악시 돼 온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만 해도 이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이런 사회분위기를 바꿔 놓은 것은 기독교의 전파다. 동성애를 극형에 처하도록 한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이를 처벌하는 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중세 말기에 접어들면서 이에 대한 처벌은 강화되기 시작했고 13세기 중반에는 거의 모든 유럽 국가가 이를 극형으로 다스렸다. 상대방을 동성애자로 몰아 몰살시키고 재산을 몰수하는 일도 빈발했다. 프랑스에서 카타르 혹은 알비겐센파 종교 집단과 ‘성전 기사단’이 이런 이유로 무자비한 탄압을 받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동성애자에 대한 박해는 그후로도 오래 계속됐는데 영국에서는 19세기초까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진 사람이 있다. 영국의 전통을 이어받은 미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20세기 후반까지 동성애를 범죄로 처벌했다. 1986년 연방 대법원은 ‘바워스 대 하드윅’ 사건에서 동성애를 금지한 텍사스 주법은 합헌이라고 판시했고 1996년 빌 클린턴은 남녀간의 결합만 결혼으로 인정하는 ‘결혼 수호법’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런 사회 분위기는 21세기 들어 급속히 바뀌기 시작한다. 성인 남녀간의 행위는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한 국가가 간여해서는 안된다는 자유주의 사고 방식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2003년 연방 대법원은 전례를 깨고 동성애 처벌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이유로14개주에 남아 있던 동성애 처벌법을 무효화시켜 버렸다.
그 뒤 12년이 지난 2015년 연방 대법원은 ‘오버게펠 대 호지스’ 사건에서 동성 결혼 금지는 수정헌법 14조가 정한 ‘평등 보호’ 조항에 위배되므로 무효며 따라서 모든 주는 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로써 ‘결혼 수호법’은 제정된 지 20년도 안 돼 사실상 폐기됐다.
이런 급속한 사회 정치적 변화는 지난 20여년 동안 동성애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이 상전벽해라 해도 좋을 만큼 달라졌기 때문이다. 갤럽에 따르면 1996년 27%에 달하던 동성 결혼 지지율은 이제 71%에 이르고 있다. 사회적 소수인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와 다르기는 하지만 이들간의 관계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존중돼야 한다는 폭넓은 공감대가 이뤄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 주 연방 상원에서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동성 결혼을 연방 차원에서 인정하고 보호하는 법안이 61대 36으로 통과된 것이다. 민주당은 물론이고 12명의 공화당 의원들까지 찬성표를 던지는 바람에 필리버스터를 깰 수 있는 60표를 넘어섰다는 점이 놀랍다. 아직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는 연방 하원은 이번 주 이 안을 통과시킬 예정이고 바이든 대통령은 서명 의사를 밝힌 바 있어 법으로 제정될 것이 확실시 된다. 바이든은 이번 표결은 “사랑은 사랑이고 미국인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권리가 있다는 근본적인 진리를 확인시켜 줬다”고 말했다.
‘결혼 수호법’을 공식 폐기하는 이 법안은 공화당 의원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 종교 단체로 하여금 모든 결혼을 위한 서비스 제공을 강제하거나 이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세제 혜택을 박탈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딸이 동성 결혼을 한 척 슈머 연방 상원 다수당 원내총무는 이 법안 통과에 눈물을 흘리며 딸 부부가 아무 걱정 없이 사랑과 안심 속에 자녀를 키울 수 있게 되기를 기원했다.
최근 콜로라도 동성애 나이트클럽 총격 살해 사건이 보여주듯 아직도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남아 있지만 이 문제만큼 미국 사회가 짧은 시간에 큰 진전을 보인 이슈는 없다. 타인을 해치지 않는한 누구라도 인종과 피부색, 성적 취향에 관계없이 차별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은 미국의 건국 이념이자 연방 헌법의 핵심 사항의 하나다. 동성애자 평등권 보호를 위한 긴 여정은 미국 사회가 느린 것 같지만 때로는 의외로 빨리 전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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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