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은 원래 진보적인 정당이었다. 1854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한 것은 노예제 확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었고 공화당의 에이브러험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노예제를 기반으로 하는 남부주들이 연방 탈퇴를 선언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남북 전쟁이 끝난 후 남부 주들은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한 조건으로 인두세 등 세금에다 독해력 시험 등 까다로운 조건을 붙여 흑인들의 정치권을 박탈했다. 오랫 동안 공화당은 남부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남부는 공화당의 주요 세력 기반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 원인은 닉슨의 ‘남방 전략’(Southern Strategy)에서 찾아야 한다. 케네디-존슨 행정부가 추진한 연방 민권법과 투표권법이 시행되면서 남부 주들 사이에 민주당에 반감을 갖는 백인들이 늘어났다. 닉슨의 보좌관으로 남방 전략 이론가였던 케빈 필립스는 1970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공화당은 흑인표를 10~20% 이상 얻지 못할 것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흑인이 민주당으로 더 투표할수록 흑인을 싫어하는 백인은 공화당으로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흑인과 백인을 편가르고 그걸로 선거에서 이기겠다는 병든 의식을 보여준다.
2005년 공화당 전국위 의장이던 켄 멜먼은 인종 차별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사실을 인정하고 유색인종 지위향상협회(NAACP)에 사과했지만 말뿐이었다. 공화당은 이 전략을 버리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결과 득을 봤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도대체 왜 많은 백인들이 입증된 사기꾼에다 내란 선동 혐의가 짙은 트럼프를 아직도 지지하고 있는지 의아해 하고 있다. 이를 공화당의 ‘신 남방 전략’의 일환으로 이해하면 실마리가 풀린다. 트럼프 지지자들을 열광하게 한 것은 그의 “멕시코 강간범” 발언이다. 트럼프는 밀입국자 가족을 이산 가족을 만들고 회교도 국가에서의 입국을 금지하며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옹호했지만 추종자들로부터의 인기는 오히려 올라갔다. 가장 반기독교적 삶을 산 그의 강력한 지지자는 백인 기독교도들이다.
공화당 백인들의 맹목적인 트럼프 지지 뒤에는 이민자, 유색 인종, 비기독교인에 대한 반감과 함께 머지 않아 미국의 주도 세력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불안이 깔려 있다. 공화당은 1992년 이후 대선 유효표에서 이겨본 적이 거의 없다. 2004년 아들 부시 재선 때가 유일하다.
2000년과 2016년 총 유효표에서 지고도 선거인단이란 구시대적 제도 덕에 공화당이 겨우 이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공화당의 지지 기반인 백인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날이 갈수록 줄고 있기 때문이다. 인구 통계국 조사에 따르면 2045년이 되면 미국내 백인 인구 비율은 49.7%로 떨어진다. 미 역사상 처음 백인이 소수가 되고 소수계가 다수가 되는 세상이 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트럼프가 재판에서 판판이 진 후에도 선거 부정을 주장하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백인 공화당원 대다수가 이를 지지하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이들에게 부정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소수계의 지지를 받는 민주당이 이기는 결과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공화당 주도로 소수계의 유권자 등록과 투표를 어렵게 하는 수작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 화요일 열린 예선에서 트럼프의 지지를 받는 후보들이 대거 공화당 후보로 뽑혔다. 특히 애리조나는 주지사부터 연방 상원 의원, 연방 하원의원, 주총무처 장관, 주 상하원의원 등 트럼프가 지지한 12명의 후보 중 11명이 공화당 후보로 당선됐다. 미주리, 캔자스, 미시건 등 타주도 이 정도는 아니지만 비슷하다. 지금까지 트럼프 지지를 받은 후보 188명 중 낙선한 사람은 14명에 불과하다. 공화당에서 트럼프에 밉보인다는 것은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도 트럼프에 반기를 든 공화당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와이오밍의 연방 하원의원 리즈 체이니가 대표적이다. ‘1월 6일 의사당 난입 사건 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체이니는 트럼프 같은 인물이 다시는 백악관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고 믿고 있다. 그로 인해 다음 달 있을 공화당 예선에서의 패배가 확실시 되지만 뜻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다.
리즈의 아버지이자 한 때 공화당의 실세였던 딕 체이니는 그녀를 위한 캠페인 광고에서 “246년 우리 나라 역사에서 도널드 트럼프보다 우리 공화국에 더 큰 위협이 된 인물은 없었다”며 “그는 유권자들이 그를 버린 후 권좌를 유지하려고거짓과 폭력으로 지난 선거를 훔치려 했다. 그는 겁쟁이”라고 말했다. 이보다 진실된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직접적이고 현존하는 위협이다. 올 11월 선거에서 그를 떠받드는 공화당 후보를 낙선시키는 것보다 시급한 일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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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