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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할 말 못하는 민주국가들

2022-05-02 (월) 파리드 자카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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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기에 우크라이나전은 오늘날의 세계를 민주국가와 전제국가들 사이의 대결장으로 특정한 바이든 대통령의 거듭된 발언이 옳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듯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전제국가인 러시아는 민주국가인 우크라이나에 야만스런 공격을 가하고 있고, 후자는 서방국들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같은 기본구도는 정확하거나 유용한 미국 외교정책의 가이드가 아니다. 세계의 많은 민주국가들이 우크라이나 지원 대열에 합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거느린 민주국가인 인도는 모스크바의 침략전쟁을 비난하지 않았고, 모스크바에 대한 국제 제재를 준수한다는 약속도 하지 않았다.

인도만 그런게 아니다. 인도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민주국가인 인도네시아는 러시아에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민주주의 정착에 성공한 최대 국가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역시 러시아를 비난하기는커녕 나토의 확장이 모스크바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촉발했다고 주장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최대 민주국가인 브라질과 멕시코는 중립을 유지하면서도 러시아의 유엔인권이사회 퇴출여부를 결정하는 표결에서 기권표를 던졌다. 제대로 기능하는 민주주의체제를 지닌 유일한 아랍권 국가인 이라크는 유엔의 러시아 규탄결의안 표결에서 기권했다. 민주국가 국민들의 대다수가 이 거대한 이념투쟁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한 셈이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국가이익이 이상주의를 누른 단순한 케이스처럼 보일 수 있다. 이들 국가들 중 상당수는 모스크바와의 관계가 단절될 경우 만만치 않은 경제적 타격을 입게 된다. 예를 들어 인도의 첨단무기는 대부분 러시아에서 들어온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브라질은 러시아와 결정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어도 상당히 중요한 교역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전제국가들에 대항하는 거대한 이념적 십자군 운동이라는 아이디어는 개발도상국가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들 중 많은 국가들은 중국과 강력한 경제관계를 맺고 있고, 주변의 다른 전제국가들과 긴밀한 동맹관계에 있다.


이렇게 보면 현재의 상황에 제대로 들어맞는 프레임은 룰에 기초한 국제질서를 신봉하는 나라들과 그렇지 않은 국가들 사이의 분열이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러시아는 바로 이 같은 질서의 핵심, 즉 국경은 무력으로 변경되지 않는다는 규범에 공격을 가하는 불량국가의 선두주자에 해당한다. 모스크바는 순수한 힘의 정치라는 영역으로의 회귀를 추구한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투키디데스의 말을 빌리자면 “강자들은 얼마든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약자들은 고통에 시달려야만 하는” 세계로 돌아가길 원한다는 얘기다.

서구가 이런 시도를 막는다는 명분을 앞세워 연합세력을 결집한다면 어렵지 않게 많은 동조국가들을 확보할 것이다. 데이비드 밀리밴드 전 영국 외무장관이 말했듯, 룰에 기반한 질서에 뿌리를 둔 분열은 민주국가대 전제국가 사이의 대립에 바탕을 둔 분열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예컨대 아직 완전한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볼 수 없는 싱가포르는 국제 규범과 가치를 강력히 지지한다. 러시아의 침략 초기, 싱가포르는 40여년 만에 처음으로 국제제재에 동참을 결정했다. 싱가포르의 결정은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유엔안보리의 제제 결의안이 부결된 가운데 나왔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유나이티드 아랍에미레이트(UAE)와 같은 절대왕정국가들은 당연히 전제주의국가들과의 전쟁에는 끼어들지 않으려 들 터이지만 열린 국제시스템을 지키자는 호소에는 호응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프레임은 인도와 인도네시아에게 러시아의 공격을 그대로 놓아둘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곰곰이 따져보게 만들 것이다. 만약 침략전쟁과 인접국 합병을 강행한 국가들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넘어간다면 향후 양국의 국경지역에서 중국이 도발을 감행한다 해도 뉴델리로서는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지지를 기대하기 힘들어진다. 유엔주재 케냐 대사의 지적대로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되기 직전, 아프리카 국가들은 순수한 문화와 인종에 바탕해 그들의 국경선을 재설정하려 시도할 경우 대혼란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따라 과거 식민지 시대에 그어진 국경선을 그대로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프레임을 걸면, 룰에 기반한 국제질서의 최대 수혜자인 중국 또한 더욱 큰 압박을 받게 될 것이다. 중국이 안정되고 번영을 구가하는 아시아에서 평화롭게 부상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열린 틀 덕분이었다. 베이징은 국가주권 침해에 종종 강력한 반대 목소리를 냈지만 이번에는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 편에 섰다. 국제사회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도록 우리는 중국의 이 같은 위선적 측면을 대대적으로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전략이 통하려면 서구, 특히 미국은, 룰에 기반한 국제 시스템을 더욱 강력히 고수해야한다. 미국의 강경조치, 그중에서도 이라크전은 서방의 위선이라는 비난을 불러왔다. 바이든 행정부는 러시아에 대한 전쟁범죄 조사를 촉구했지만 미국은 국제형사재판소 회원국이 아니다. 또한 미국은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국제해양협정을 위반했다고 비난하지만 협정 조인국이 아니다.

국제사회가 룰에 기반한 국제질서를 지지해주기 원한다면 미국은 그들이 하는 말을 지금보다 한층 개선된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예일대를 나와 하버드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파리드 자카리아 박사는 국제정치외교 전문가로 워싱턴포스트의 유명 칼럼니스트이자 CNN의 정치외교 분석 진행자다. 국제정세와 외교 부문에서 가장 주목받는 분석가이자 석학으로 불린다.

<파리드 자카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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