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86에 까이고, MZ에 치이고… ‘낀세대’는 서럽다

2022-03-28 (월)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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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세대 위로하는 드라마 봇물
▶ ‘IMF 직격’ 계층 상승 사다리 못 탄 X세대

▶ 기득권 쥔 86, 목소리 큰 MZ에 치여 몸살
▶ ‘아직 최선을…’ 정체성 찾는 사십춘기 조명
▶ ‘스물다섯…’ ‘서른, 아홉’등 성장통에 눈길

86에 까이고, MZ에 치이고… ‘낀세대’는 서럽다

드라마 ‘스물 다섯, 스물 하나’ 속 이진(남주혁·왼쪽)과 희도(김태리)가 강릉으로 여행을 가 비디오로 촬영하며 웃고 있다. 드라마 속 시대적 배경은 1998년이다. 이 드라마는 14일부터 20일까지 넷플릭스 비영어권 드라마 부문에서 시청 시간 2위를 차지했다. [tvN 제공]

금필(박해준)은 ‘44춘기’다. 고등학생 딸을 둔 가장은 다니던 제약회사에 사표를 냈다. 웹툰 작가가 돼 “자아를 찾겠다”는 게 이유다. 난데없는 독립 선언은 아니었다. ‘꼰대 상사’의 영업 압박에 다크서클이 광대까지 내려온 금필은 점심 메뉴조차 제 마음대로 고르지 못했다. MZ세대인 직장 후배들에게 치여 취향을 묵살당했다. 과장은 일터에서 ‘나’를 찾을 수 없다. “내 자유와 권리는 어디에 있는가?” 학창시절 록밴드를 했던, 1978년생 ‘X세대’인 금필에겐 생존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 티빙에서 25일 마지막 회가 공개될 드라마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에서 금필이 회사를 나와 중년 ‘프리터족’이 된 배경이다.

웹툰 작가 되겠다고 퇴사한 X세대 가장

‘낀세대’가 대중문화의 주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IMF) 이후 중퇴한 96학번 백이진(남주혁)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tvN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비롯해 JTBC ‘서른, 아홉’ 등 낀세대와 그들의 성장통을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들이 요즘 인기다.
1970년대 중반~1980년대 초반에 태어나 90년대에 자유롭게 학창 시절을 즐긴 X세대들은 사회에 나와 어느덧 중간관리자로 성장했다. 40대는 세대 전쟁을 벌이는 86세대와 MZ세대 사이 윤활유 역할을 할 세대로 중요시됐지만, 현실은 달랐다. 조직의 든든한 ‘허리’여야 할 이들은 존재감을 드러내는 대신 정체성을 잃고 방황했다. 이런 세태에서 대중문화가 X세대를 주목하고 위로하면서, ‘낀세대 담론’이 다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개인주의 중무장한 신인류는 어디에

1990년대 초반,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를 따라 부르며 등장한 X세대의 존재감은 막강했다. 표현의 자유와 개인주의로 중무장한 X세대는 신인류였고, 기성세대를 바짝 긴장케 했다. 그 위풍당당하던 X세대의 처지는 20여 년이 흘러 확 쪼그라들었다. 정치·경제의 기득권을 쥔 86세대와 할 말 다 하는 MZ세대에 끼여 몸살을 앓고 있다.

‘X세대에서 낀낀세대로: 40대, 그들은 누구인가’(2019·메디치미디어)에서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X세대를 ‘낀낀세대’로 표현한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주의 세대의 등장을 알린 X세대는 IMF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다”며 “그들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압박을 받았고, 이는 기존의 감성적 개인주의와 결합해 낀낀세대의 복합적 내면을 구성했다”고 분석했다. X세대는 IMF로 인한 신자유주의의 직격탄을 맞고, 그 이후 계층 상승의 사다리에 올라타지 못해 사회적 성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86과 MZ세대 사이에 치이기까지 하면서 존재감이 납작해졌다는 것이다.

앞뒤가 꽉 막힌 X세대에겐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전근대적 조직 운영 방식과 권위적인 86세대 상사의 지시를 ‘공정’에 민감한 MZ세대에 전달하는 악역을 맡으면서 되레 설 곳을 잃고 있다. ‘94학번’ 김태호, 나영석, 신원호 PD가 모두 연공서열로 촘촘한 거대 방송사를 떠나 홀로서기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KBS를 떠날 때 나 PD는 “부장이 돼 책상에만 앉아 있기 싫었다”고 말했다. X세대가 유목민이 되려는 이유다.

“부장 되기 전 퇴사” 유목민 된 X세대

대기업 부장급인 김미선(42·가명)씨는 “MZ세대 후배 중엔 휴가 기간에 단톡방에서 나가는 직원도 있다”며 “위에선 아직도 ‘까라면 까’라는 식으로 업무 지시가 내려오는데, 그걸 MZ세대 부원들에게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일일이 설명하고 설득시키지 않으면 납득하지 않아 부대낀다”고 말했다. 그래서 미혼인 직장인 박소민(44·가명)씨는 부장이 되기 전 퇴사를 준비하고 있다. 박씨는 “관리직이 되면 아예 나를 버려야 한다”며 “’까라면 까’라는 지시는 더 노골적으로 내려오고, ‘제가 왜 해야 되죠?’라고 꼬치꼬치 따지는 MZ세대 후배 모시며 닳아 없어지느니, 안전성은 좀 불안하더라도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곳에서 새 출발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공황장애 휴직’ 낀세대의 현실


대중문화에서 낀세대인 X세대는 위태롭다. ‘서른, 아홉’에서 미조(손예진)는 공황장애로 휴직을 준비 중이고, 찬영(전미도)은 시한부 판정을 받았으며, 주희(김지현)는 직장에서 뛰쳐나와 퓨전 중국집에서 ‘알바’를 뛴다.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명문대 입학 선물로 스포츠카를 선물받은 이진은 IMF로 돈, 가족, 꿈을 모두 잃었다. “네 꿈을 빼앗은 건 시대야.” 98년 고등학생이었던 펜싱 선수 희도(김태리)는 학교 코치에게 이런 말을 듣고 절망한다.

드라마는 IMF 때 청춘을 보낸 X세대를 회고하고,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은 “X세대 특유의 생물학적 성장과 사회학적 성장의 불일치가 그간 내가 잃어버렸던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자꾸 성찰하게 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방송가 관계자들에 따르면 치킨집을 운영하며 새로운 인생을 꿈꾸는 40대 구필수(곽도원)를 내세운 드라마 ‘구필수는 없다’가 올해 방송을 목표로 제작되고 있다. 공희정 문화평론가는 “X세대는 IMF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전에 청춘의 낭만과 희망을 경험해 본 마지막 세대”라며 “희망조차 품지 못한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의 MZ세대와 달리 X세대는 허락된 땅은 없어도 틈틈이 독립을 꿈꾸는 게 차이”라고 분석했다.

‘포켓몬빵’ 열풍의 그늘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에 출연해 최근 화상으로 만난 박해준(45)은 중년이 돼 다시 자아를 찾으려는 금필을 연기하며 “진짜 속마음을 확인하게 하는 계기가 돼 위안받았다”고 말했다. 본보가 티빙에 의뢰해 이 드라마 연령별 시청층을 파악해 보니, 40대 남성 시청자가 첫 주 대비 공개 5주 차에 40% 껑충 뛰었다.

정체성 혼란으로 ‘사십춘기’를 겪는 낀세대증후군은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1998년 출시된 ‘포켓몬빵’의 난데없는 매진 행렬도 그중 하나다. 김헌식 카이스트 미래세대행복위원회 위원은 “포켓몬빵 열풍의 한 축이 X세대”라며 “현실에서 성취감을 잃고 성장이 멈췄다고 느끼는 이들이 빵 속 스티커를 통해 ‘소확성(소소하지만 확실한 성취감)’을 느끼려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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