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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씨와 불꽃

2021-08-19 (목) 김용현 한민족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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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1.4 후퇴 때 남쪽으로 가는 화물열차를 기다리며 노량진 역전에서 밤을 새운 엄동의 그 날은 기억하기도 두렵다. 그렇게 해서 피난지로 정착한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용암리는 노량진 역전 못지않은 추운 동네였다. 영동과 경상북도 상주로 이어지는 소백산맥 산중이라 해는 짧고 골짜기 따라 바람은 세차고-- 지구의 기후 변천사를 보면 추위는 1950년대에 정점을 찍고 그 이후 온난화의 길로 들어섰다고 하는 바로 그 즈음이다

어머니는 신작로에 나가 퇴각하는 방위군과 피난민 상대로 국밥장사를 하셨다. 그 때 방위군은 행색이 너무 초라해 밥값을 받지 않을 때가 많았다고 하셨다. 이승만 정부의 고위 장성들이 군수물자를 착복해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젊은이들 중 무려 9만 명에 이르는 아사자와 동사자를 낸 국민방위군사건이 있었다. 외할머니는 집에서 어린 외손자들 거둬주시며 어머니가 들어오실 시간이 되면 ‘에미 몸 녹여 줘야한다’며 서둘러 화롯불을 장만하시곤 했다.

우리들이 실수로 화롯불을 죽여 버리면 외할머니는 윗집에 가서 불씨를 얻어오셨다. 그런데 불씨를 얻어 오시는 그 윗집은 어릴 때 서울에서 우리 집 가정부로 일하다 전쟁 직전 시골에 돌아와 결혼해 잘 살고 있는 월선 네 집이었다. 피난민으로 형편이 역전된 우리는 ‘왜 하필 월선 네서 얻어 오시느냐’며 볼멘소리를 했지만 할머니는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불씨만 살리면 그만이셨다. 옛 부터 집안에서 불씨를 지키고 살려나가는 일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올림픽에서도 성화의 불씨를 지키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도쿄 올림픽이 끝나면서 올림픽의 상징인 성화는 파리로 옮겨가게 될 것인데 운반해 가는 그 과정에서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사람들은 여간 조심하지 않을 것이다. 4개의 분리된 격벽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성화봉이지만 봉송될 때는 항상 그 곁에 성화봉 전문가가 자전거로 따라가기도 하고 만일을 생각해 성화봉 대열의 후미에는 미니버스가 예비용 불꽃 램프를 싣고 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도쿄 올림픽에 집착했던 일본의 우익 정치인들에게 올림픽 정신이나 인류의 평화 염원 같은 것이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2018년 평창에서 있었던 동계올림픽은 달랐다. 분단된 한반도 남쪽에서 두 번째로 열린 올림픽 경기에 남과 북은 일부나마 단일팀을 만들었고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해줬던 그 꿈같던 장면들, 그것은 바로 평화의 불씨였다. 그 불씨는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두 번의 북미 정상만남으로 불꽃을 당겨갔지만, 아쉽게도 거기까지였다.

다시 불씨는 가물가물해지고 있다. 한국은 전시작전권 전환도 제때에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데 한미연합훈련을 안하거나 다음에 하면 되지 굳이 강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북한은 그 훈련이 방어적 성격이고 코로나로 대폭 축소된 것을 알면서도 새삼스레 ‘배신적 처사’니 ‘엄중한 안보위협에 직면할 것’이니 하며 14일 만에 또 전화선을 끊어버린 이유는 무엇인지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도발이든 충돌이든 무력사용은 남북한 모두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다.

평화의 불씨가 꺼지지 않게 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그 일은 미국이나 중국의 위정자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남북한 당사자가 해야 한다. 불씨는 너무 헤집어 놔도, 너무 깊이 덮어두어도 안 되며 불씨를 꺼뜨리고 이웃나라에 구걸하러 다녀서도 안 된다. 문재인 정부가 그 일을 충실히 해왔는데 이제는 그 평화의 불씨를 인계받을 릴레이 선수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봐야 한다.

그럴 경우에라도 정치인들에게만 그 일을 맡겨놓을 수 없다고 판단해 서울의 참여연대와 미주의 해외민주통일연대 등 국내외 시민단체들이 세계인 1억 명을 대상으로 2023년까지 한반도평화협정 서명 캠페인을 펴고 있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길게 봐야 한다. 지금은 활활 타오르다 꺼져버릴 열정의 불꽃이 아니라 작은 평화의 불씨하나 지키고 살려나가는 일이 필요한 때다.

<김용현 한민족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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