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30년간 호황 불황 반복… 그래도 내겐 천직”

2021-02-26 (금) 이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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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플 & 비즈니스 - 리맥스부동산 폴 유 에이전트
안정된 공무원서 부동산 매력에 빠져 전직, 폭동·지진·신용위기때 한인 돕던 일 큰 보람

▶ “부동산은 단순한 세일즈 아닌 컨설팅” 자세로, 정보 과잉 시대…전문가의 꼼꼼한 분석 더 필요

“30년간 호황 불황 반복… 그래도 내겐 천직”

폴 유 에이전트는 폭동과 지진, 불경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을 거치는 지난 30여년간 고객들과 애환을 같이하며 주택판매자가 아닌 고객의 삶을 돕는 컨설턴트로 그들과 동행했다. [박상혁 기자]

부동산 시장이 뜨겁다. 코로나19가 전방위로 충격을 줬지만 부동산 시장만은 견고했다.

역설적이지만 코로나19가 주택 판매 호조를 가져왔다. 재택근무, 원격수업으로 주택이 필수 생존 아이템이 됐다. 집에 최고 가치를 두면서 퍼스트 바이어 뿐만 아니라 기존 주택소유주도 더 큰 집을 찾았다. 여기에 주택담보대출이 초저 금리로 유지되면서 신규 및 기존 바이어가 넘치고 있다.

하지만 주택 매물은 말랐다. 최고의 셀러 마켓이다. 판매 주택 한 채에 평균 10~15개, 많게는 20개까지 오퍼가 몰린다.


코로나 속 가족 안위가 달린 집을 사려는 바이어, 기대치 보다 껑충 뛰어오른 주택시세로 판매를 결심한 셀러, 그 사이에 부동산 에이전트가 있다. 지금 같은 호황기 뿐만 아니라 침체기가 극과 극을 향해 치솟고 내리달리는 부동산 시장. 개개인이 구입할 수 있는 가장 비싼 물건이 출렁이는 이 곳에서 몇 십 년을 풀타임으로 일하며 서바이벌 한다는 것은 직업, 그 이상을 넘어서야 가능하다.

리맥스 부동산 소속 폴 유 에이전트는 이런 부동산 호황기와 침체기를 수없이 겪었다. 10명 중 1~2명만 살아남는다는 부동산 업계에서 그는 30년 넘게 사우스베이 지역 전문 에이전트로 일하고 있다. 이젠 집주소만 봐도 대강 집구조가 그려진다.

유 에이전트는 부동산 에이전트라는 직업을 세일즈가 아닌 컨설팅으로 해석했다. 중개인에서 컨설턴트로 확장하는 통찰력 넘치는 마인드셋은 공군에서 공무원으로, 공무원에서 부동산에이전트로 삶을 전환하며 최선의 삶을 찾게 한 원동력이었다.

유 에이전트는 수산회사 지사장으로 미국으로 발령받은 아버지와 함께 스무살이 갓 넘은 1979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 나라에 동화되라. 군대가라”라는 아버지 말씀에 미군입대가 학비 및 각종 혜택은 물론, 시민으로 살기에 좋은 시작이라 생각했다.

미공군에서 비행기정비공으로 3년 동안 복무했다. 1년 의무인 해외주둔지로 독일을 선택했다. 한국에서 달러 쓰면 으쓱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익숙하고 편안함 대신 낯설고 새로운 독일에서 1년을 보내며 유럽 문화를 섭렵했다.

제대 후 베테런을 우대해 주는 연방공무원에 지원했다. 항공정비사가 되기 위해 항공전문대학교를 다니며 24시간 돌아가는 우체국에서 야간근무도 했다. 낮에 학교 가고 밤에 일하고, 치열하게 살았다.


결혼도 했다. 아이가 태어나자 가정, 학업, 일을 도저히 병행하기 힘들어 학교를 중단했다.

우체국에서 소수계 이민자로서 성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하던 무렵 우연히 TV에서 부동산 광고를 봤다. 바로 자격증 시험을 보고 합격 후 토랜스 센추리21에서 파트타임으로 부동산 에이전트를 시작했다.

매주 100채 가까이 방문해 직접 리스팅을 받은지 8개월. 유 에이전트는 5년간 일하던 우체국을 그만 두고 89년, 풀타임 부동산 에이전트로 새 삶을 시작했다. 미국 경기가 호황기로 접어들고 부동산 시장도 꽤 좋았다. 점차 수입이 공무원보다 나아졌다.

토랜스는 일본인 주 거주지역이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캄튼, 잉글우드 등지에서 리커스토어, 마켓, 스왑밋 등 자영업을 하는 한인들이 사업체와 가깝고 안전한 거주지를 찾아 토랜스 포함 사우스베이 지역으로 이주하며 집을 구입했다.

90년대에는 부를 축척한 고객들이 팔로스버디스, 맨해튼비치 등 부촌 고급주택을 매입했다. 고객들 비즈니스가 성장하는 만큼 유 에이전트 일도 바빠졌다. 고객은 작은 비즈니스로 시작해 돈을 모으면 주택을 구입하고 그 다음 상업용 건물, 그다음 고급주택, 세컨홈을 구입하는 식이었다. 유 에이전트도 고객의 비즈니스 성장에 동행하며 주택과 상업용 매물 경계 없이 종횡무진하며 에스크로를 끝냈다.

하지만 92년 4.29 폭동과 94년 노스리지 지진, 불경기가 함께 왔다. 고객들 사업체가 큰 피해를 입으며 유 에이전트 역시 힘들었다. 한 번에 에스크로가 5개나 깨지고 살길이 막막해졌다.

하지만 한인 고객들은 추스르고 일어났다. 비즈니스 피해 보상도 돕고 숏세일도 도왔다. 97년이 되니 고객들 비즈니스가 회복되고 부동산 시장이 다시 살아났다.

그 후 2000년 초 호황기,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을 경험하며 15년이 지나갔다. 매물을 리스팅북에서 보던 시대에서 누구나 매물 정보를 실시간 보고 공유할 수 있는 인터넷 세상이 됐다.

어느덧 바이어들도 밀레니얼 세대로 넘어갔다. 부동산 에이전트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반전이 있었다. 인터넷에 정보가 넘치다 보니 바이어, 셀러 모두 곤혹스러워했다. 리스팅 매물이 정말 괜찮은 집일까, 리스팅 가격이 시세에 맞나, 똑같은 집은 없는데 동네 다른 집과 비교하면 등등으로 전문가가 필요했다. 고객은 단순히 주택 세일즈가 아닌 컨설턴트가 필요했던 것이다. 유 에이전트는 “넘치는 정보를 경험으로 분석한다”고 말했다.

부동산 시장에 바이어가 넘치는 요즘에도 지난 30년 동안 그랬듯이 고객에게 왜 집을 사는지 반드시 물어본다. 결혼, 이혼, 출산, 은퇴 등 고객이 집을 사는 이유는 반드시 있다. 이것을 알아야 주택판매자가 아닌 한 사람의 삶을 돕는 컨설턴트로 동행할 수 있다. 이것이 ‘부동산은 고객과 같이 크는 비즈니스‘라는 유 에이전트의 말이 설득력 있는 이유다.

<이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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