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퓰리처상 수상자 강형원 기자의 한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 (19) 의병대장 권응수
▶ 창의정용군 의병 이끌고 5일간 전투서 왜군 격파, 임진란 양대 쾌거로 기록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점령했던 경상북도 영천성을 수복하는 전투를 지휘해 ‘육지의 이순신’으로 불리는 권응수 의병대장의 초상화. 선조의 명에 의해 어진화사(궁의 초상화가)가 그린 것이다.

영천성 전투에서 의병들이 사용했던 쌍자총통(다연발 소형화포)과 화약통. 경상북도 영천시에 있는 영천역사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군사시설이었던 성벽들은 일제강점기 중에 대부분 파괴돼 없어졌다. 의병대장 권응수가 공성전 전투를 승리로 이끈 현장이었던 영천성벽 일부를 둘러보는 영천역사박물관장 지봉스님.

영천성 수복을 한 영천 의병을 3등 공신에 임명한다는 선조가 내린 교첩. 영천역사박물관 소장.

선조가 내린 선무원종공신녹권.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나라를 구한 공로가 있는 사람들의 명단이다. 선조의 옥쇄가 찍혀 있다. 영천역사박물관 소장.

영양(영천)복성도 - 1822년 작품에서 임진왜란 중 영천성 수복을 기록한 목판 그림. 영천역사박물관 소장

임진왜란의 첫 전투지였던 부산진성이 함락되는 모습을 기록해놓은 부산진 순절도. 당시 격렬한 싸움이 묘사되어 있다. 영천역사박물관 소장.

1592년 영천성을 왜군으로부터 되찾은 의병 ‘창의정용군’의 임진왜란 전쟁 기록을 특별 전시하고 있는 영천역사박물관.

영천역사박물관은 대한민국 최초의 지역사 전문 사립박물관이다.
우리 땅에서 일어났던 비극 중의 비극이었던 임진왜란은 1592년 4월14일 부산진성이 왜군에게 오전 중 함락되고, 다음날인 15일에는 두 시간 만에 부산 동래성이 함락되면서 시작됐다. 곧바로 21일에는 고려시대 동경(지금의 경주)이 쉽게 왜군에게 넘어가고, 이어서 경상북도 영천이 4월23일에 왜군에게 점령당하면서 왜군의 침략이 본격화됐다.
17만여 명에 달했던 왜군 병사들은 일본에서 1467년부터 100년 이상의 전국시대(戰國時代) 내전을 통해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훈련이 잘 되어 있던 정예군이었다. 이들은 칼로 두부를 자르듯 한반도를 가르며 명나라를 향해 진군했고, 선조왕은 궁을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의주에서 멈춰 머물렀다.
그 와중에 일본의 전쟁 계획에 없던 이변이 경상북도 영천에서 일어났다. 육지 최초의 대규모 전투(공성전)를 승리한 한 기록이 있다. 이 전투에서는 의병으로 모인 현지 선비와 농부, 은혜사 승려, 그리고 노비들에게 의병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끼니를 해결해 줄 만한 넉넉한 양식과 고기를 사령관이 지급하는 등 우리 역사에서 보기 어려운 완벽한 보급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1583년 여진족 정벌에 참여했고, 다양한 전쟁 경험을 가지고 있던 무관 권응수는 1592년 7월23일 영천에서 모집한 3,560명의 의병을 ‘창의정용군’이라고 이름 짓고 왜군들이 주둔하고 있던 영천성 습격을 감행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공세를 펼친 것이다.
1592년 여름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왜적과 싸우는 동안 영천에서는 7월23일부터 5일간의 전투가 벌어졌고, 27일에는 의병의 숫자가 3,970명으로 불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병들은 현지 지형과 기후에 능통한 민간인들로, 동북아시아의 최정예 직업 군인들을 바람을 등진 화공작전으로 모조리 태워버리는 등 5일간의 전투에서 1,000여 명의 왜병 중 519명의 목을 베어서 명나라 요동에 보냈다고 조선왕조선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명나라의 도움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선조의 기대와 바람을 반영해 참수한 왜군 머리 519과(科)를 요동 지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명군에게 전달한 데에는 이처럼 영천 의병들의 역할이 컸다. 이로써 조선인들이 왜군에 맞서 싸우고 있다는 의지를 확고히 전달한 것이다.
5일간의 영천성 전투에서 의병 피해는 사망 83명, 부상 200여 명 정도였지만, 의병들의 기습으로 참패한 왜군은 전쟁 계획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차질이 생겼다. 그 배경에는 의병들을 조직했던 권응수 의병대장이 각 개인의 전투 능력에 맞추어 지급한 쌀과 고기가 있었다.
창의정용군 의병에 참여한 노약자나 짐꾼들에게는 하루 쌀 3되(4.8kg)과 고기 2근(1.2kg)이 지급됐고, 장정에게는 하루에 쌀 6되(9.6kg)와 고기 2근이 지급됐으며, 각 지역 의병장들에게는 쌀 8되(12.8kg)와 고기 2근씩, 전봉별장(돌격대장)에게는 쌀 2말(32kg)과 고기 4근(2.4kg), 그리고 상장(대장)에게는 쌀 1말(16kg)과 고기 3근(1.8kg)이 하루 배급량으로 나누어졌다.
권응수 의병대장이 창의정용군으로 나온 의병들이 식구들의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전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것은 당시 취약한 계층 출신 의병들에게 정말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대우였다고 하겠다.
3,960명의 의병들의 식사를 준비했던 인원은 물 긷는 병사(급졸) 60명, 땔깜 나무를 수집하는 병사(신졸) 42명, 그리고 밥 짓는 병사(취졸) 33명 등 총 135명이었다고 혼암 선생 홍경승 실기에 기록되어 있다.
전쟁을 치르면서 생활이 넉넉한 집에서 곡식을 날마다 받아오고, 관에서 비상시를 위해 북습 창고에 축척해놓은 곡식을 가져오는 등 보급을 원활하게 지휘한 권응수 의병대장이야말로 체계적인 부대 조직의 모범을 보인 장수였다.
예나 지금이나 경계를 소홀이 하는 장군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병사들의 취사 관련 보급을 부실하게 처리하는 장군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진리를 권응수 의병대장은 1592년에 이미 터득하고 실천했던 것이다.
조선왕조선조실록은 “영천성 전투를 수복한 공로는 이순신의 공과 다름이 없다”라고 기록했으며, 임진왜란 중 병조판서를 지낸 백사 이항복은 “영천성 수복전투와 이순신의 명랑은 임진왜란 중 가장 통쾌한 승리였다”라고 백사별집에 수록하였다.
1592~1599년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동아시아의 최강의 정예군이 전쟁에 실패한 원인을 꼽자면 그들이 예상 못했던 이름 없는 조선 의병들의 활약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