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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 70주년을 맞아

2020-12-06 (일) 이병희 / 미 한국전 기념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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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 70주년을 맞아

장진호 전투 당시 전투에 지친 미 해병대들이 영하의 날씨에 산등성이를 행진하고 있다. <사진=미 해병 박물관>

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 70주년을 맞아

유엔군 수송선에 오르기 위해 흥남부두로 몰려든 피란민들(1950. 12. 19). <사진=연합>


# 장진호 전투(혹한의 17일)
1950년 9월 28일 미 해병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돌파했으며 북진 중 2주 후 미 해병 제1사단은 동해안 원산을 향해 인천에서 남해안을 돌아 1주일 후 원산에 상륙했다.
북괴의 임시수도인 평북 강계시를 점령하고자 해병사단 1만5천명을 비롯한 영국 해병 약 200명, 미 육군 보병 7사단 약 3,000명과 배속한 국군 카투사 약 800명 등 총 1만9천여 명이 험준한 산악지대 협곡인 개마고원의 장진호 부근으로 속전속결 진격 중이었다. 그러나 정보부족으로 인해 협곡을 둘러싸고 매복해있던 중공군 제 9병단 약 12만 명의 대병력에 포위되고 말았다.

보급로 차단과 동장군(영하 30-40도) 엄습으로 가장 고통스럽고 치열했던 전투를 벌였으며 부대전멸의 위기를 극복하고 이중삼중의 포위망을 뚫으며 겨우 임시로 건설한 활주로를 통해 부상병 약 4천500명과 전사자를 후송했다.
동시에 격전의 장진호 전투 끝에 회생한 해병 1사단과 미 보병 7사단을 비롯한 지원군으로 특파된 한국군 1군단과 미 10군단의 4만여 명에 일부 미 육군 3사단 및 한국 해병 5대대 투입이 있었다.

# 가장 치열했던 세계 동계전투 역사
이와 같이 혹한의 17일(1950년 11월 26일-12월 12일)의 전투는 불가사의한 전쟁이었으며 세계 2차대전의 독일군의 모스크바 및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비롯해 유황도(IWOJIMA)의 해병 3대 전투 및 6.25전쟁 3대 전투인 낙동강,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전쟁역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불멸의 동계전투 중의 하나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 1만5천여명 중 4천500여명의 전사자를 포함한 7천500여명의 전투요원들이 동상의 고통에 시달렸다. 특히 미 육군 7사단 31연대 배속 약 800여명의 카투사를 비롯한 75%가 동상의 사상자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9병단의 17개 사단중 7개 사단이 무력화되고 강추위에 대부분의 전력소실로 퇴진했다. 중공군의 전력 재정비를 위한 약 2주간의 공백기간을 기회로 한미연합군은 성공적인 방어지연 작전으로 부대정비와 전사상자 후송 및 군인, 장비 그리고 피난민의 흥남철수를 무사히 수행할 수 있었다. 당시 지도상의 ‘장진’은 일본의 독음에 따라 ‘CHOSIN’으로 호칭된 것은 한국지도가 없었던 탓이었다.

장진호 전투기념비는 버지니아 콴티코의 국립해병박물관(야외)에 한국정부와 민주평통협의회의 특별기부금을 포함한 60만불 예산으로 2016년 5월 건립되었다. 2017년 한국 문재인 대통령의 첫 기념비 참배가 있었는데 특히 부모가 흥남철수의 피난민으로 거제도에 정착한 문 대통령의 감회가 깊은 참배이기도 했다.
매년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가 주최하는 ‘장진호 전투영웅 추모행사’는 장진호전투 참전영웅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하고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하자는 다짐의 의식이다. 또한 (사)우리민족교류협회는 장진호전투 70주년을 기리기 위한 특별 기획사업의 일환으로 다양한 프로그램과 기념 메달 및 각 부문 특별공로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 피난민들의 흥남철수
장진호 전투의 미 해병 1사단 주력부대의 중공군의 흥남진격에 대한 최후 방어지연 작전으로 이미 12월 중순 한국, 미군 참전부대의 철수가 완료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시 승무원 정원 40명의 10만 톤 화물선인 메러디스 빅토리 호(SS MEREDITH VICTORY)는 흥남항 인근에서 미 항공기의 흥남포격을 위한 젝트유 공급임무를 맡고 있었다.

미 10군단 민사 담당인 현봉학 박사와 김백일 한국군 1군단장의 적극적인 권유로 알몬드 미 10군단장 및 라우빅토리 호 선장의 결심으로 선적 군수품을 전부 버리고 10만4천여 명의 피난민을 무사히 거제도 장승포항에 크리스마스이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는 세계전사에서 단일 선박으로 대규모의 인도주의적 인명 구출작전으로 평가되며 2004년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또한 철수 항행 중 선상에서 다섯 명의 신생아가 태어나 이들은 김치 1, 2, 3.4, 5로 호명되었으며 이미 70세 노인이 되었다.

# 라루 선장의 기적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s) 선장은 은퇴 후 뉴저지 뉴턴의 카톨릭 성 바오로 수도원의 평생 수도자로 47년간 살다 2001년 선종했다. 라루 선장은 훗날 이같이 회고했다.
“한국의 검은 바다 위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항해키를 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수도자로 하나님을 위해 살아온 라루 선장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사랑이며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위대한 성취이기 때문”이라고 수도자가 된 질문에 답하기도 했다. 2019년 3월 25일 뉴저지 대교구 아더 세라테일 대주교는 라루 선장을 성인 반열에 올릴만한 훌륭한 분이라고 말했다.

# 희생과 기억, 추모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에서 승리의 전쟁의 전설로 남아 있다.
“폐허에서 상전박해가 된 서울의 회생이 놀랍다. 우리의 희생이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었음을 이제는 한국 국민들이 증명해 달라.” 장진호전투 참전용사인 제임스 워렌 길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수많은 공산치하의 북한주민들을 자유의 땅으로 피난시킨 기적적인 사랑을 실천한 라루 선장과 한국전 참전기념공원 비문에 적혀있듯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와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조국의 부름에 응한 아들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와 같이 국가의 명령으로 싸우고 희생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이타적인 행위일 것이며 전쟁은 인간의 약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위대한 선을 행하는 모습도 드러내는 것이다.

●미 한국전 기념재단 상임이사 이병희 씨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창설된 한국 육군 제1군단사령부 정보처(전투상황실) 근무 학도병 신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동해안 38선, 원산, 함흥을 거쳐 함북, 성진까지 부대를 따라 북진했다. 동년 11월 하순 중공군의 대규모 기습공세로 미 해병대의 혹한 속에서의 17일간 장진호 전투전황을 지켜보았다. 또 눈바람 치는 흥남부두에서의 한국군과 미군 및 피난민 철수 작전의 생생한 모습을 목격한 한 사람으로 전투 및 철수 작전 70주년을 맞아 ‘아! 흥남’을 다시 기억해 보고자한다.

<이병희 / 미 한국전 기념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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