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부대끼며 살아간다. 더러는 누구에게 기댈 수 있고 누군가가 따뜻이 감싸주는 때도 있다. 그게 우리네 삶인가 보다. 삶 속에 일곱 가지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그중 어머니 자궁 안에서 가장 먼저 생기는 게 서러움과 분함이다. 감정은 물리적 실체가 없는 추상적 느낌으로 일생을 통해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문화적, 사회적, 종교적 배경에 따라 감정의 차이가 많다. 동양학생들은 서양학생들에 비해 아주 일찍부터 부끄러운 마음을 잘 표현한다. 임상 경험을 통해 동양과 서양의 우울증 환자가 호소하는 처음 증상도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서양인은 슬픈 마음과 희망이 사라졌다는 감정을 확실히 표현한다.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게 덕이란 교육 때문에 동양인은 지치고 피로하다는 신체적 문제를 강조한다.
불공정한 현실에 처할 때 느끼는 억울하고, 서러운 감정이 차곡차곡 쌓이면 한(Deep Resentment)이란 분노로 남게 된다. 어느 정도의 한은 거의 모든 정신질환에서 볼 수 있으나 화병의 경우 한은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화를 밖으로 내뿜거나 안에서 삭이지 못하고 계속 참고 살다보면 한방에서 화(Fire)라 부르는 가슴 속의 뜨거운 불덩이 뭉치가 되어 버린다.
잠시 한국에 나가 일할 때 어느 중년 여성이 찾아왔다. 그는 속에서 열이 치받아 올라 얼굴이 화끈거리고 무언가 묵직한 게 가슴 복판에 맴돌고 있어 소화도 안 되며 항상 머리가 아팠다. 여러 검사와 진찰을 마친 내과의사는 화병 같으니 정신과 의사와 상의해 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자기도 의사를 만나기 전 이미 화병으로 짐작하고 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분은 시집살이 20년간 착한 며느리 소리를 들으며 한과 불만을 그런대로 잘 참고 지냈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면 이 지긋지긋한 시집살이 이승에서 끝내지 못하고 무덤까지 가져갈 것 같다는 농담도 주고받았다. 이제 시집살이도 끝나고 자식들도 다 키워 한시름 놓는가 했는데 남편이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시집살이 동안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 속이 다시 불덩이가 되고 갱년기 증상까지 겹쳐 정말로 괴롭다는 호소였다.
한 마디로 화병은 서럽고 억울한 감정과 이를 참아내는 행동에 한이 맺힌 마음의 중독 상태다.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서도 볼 수 있지만 한국에서 많이 알려져 미 정신의학 진단 목록에 ‘문화관련 정신질환’으로 분류되었다. 여성, 특히 결혼한 여성들, 상관에게 몹시 시달리는 직장 남성들에게 자주 나타난다.
화병 환자들은 서러움, 한, 참음에 포로되어 고통받으며 살아가지만 대부분은 긍정적(운동, 종교)이든 부정적(음주, 노름)이든 자기만의 강한 심리적 방어기전을 만든다. 그 결과 비교적 현실에 적응하여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병이라 정의할 수 없다. 화가 심한 분노로 바뀌어 우울증이나, 물질 남용 장애, 만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이 동반할 때 병이 되어 전문가를 찾아오게 된다.
옛날엔 모든 정신질환을 ‘마음의 병’으로 알았지만 지금은 신체의 한 부분인 ‘뇌의 병’이란 개념으로 굳어지고 있다. 무슨 정신병이든 뇌파, 뇌 영상 검사들을 해 보면 뇌세포 조직의 변화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외부와 내부로부터 받은 모든 정보들은 뇌세포와 뇌세포를 이어주는 작은 공간(시냅스-Synapse)에서 여러 신경전달물질들을 통해 다른 뇌세포로 전해진다. 이런 신경전달물질들의 전달과정이 인간의 다양한 사고, 감정, 행동을 주관하는데 이들에 문제가 생기면 정상적인 뇌신경 회로가 구성되지 못해 정신병 증상들이 나타난다.
신경전달물질들의 불균형을 교정하여 건강한 뇌 신경회로를 만들어 주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약물이다. 그런데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은 약 복용을 싫어한다. 가족들 또한 초기 약물치료에 상당히 부정적 태도를 보인다. 고혈압, 당뇨병도 처음에 식이요법과 운동을 시도한 뒤 잘 안되면 약을 사용하는 것처럼 상담부터 시작하자고 요청한다. 그러나 거의 반세기에 걸쳐 환자들을 보며 초기에 약물로 뇌조직의 변화와 손상을 최소한 억제한 뒤 심리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좋은 방법임을 알았다.
중년여성의 지속된 마음 고통은 두정엽의 어느 부위를 과잉활성화 시켰을 것이다. 이는 신체통증을 느낄 때의 뇌 영역과 일치된다. 또한 반복된 감정자극으로 편도체와 전 전두엽이 너무 일을 많이 해 과민상태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 약물로 환자를 진정시킨 뒤 몇 번의 상담치료를 통해 증세를 많이 호전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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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