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불쑥 내 전화번호를 물으면 한참 엉긴다. 소셜시큐리티, 은행구좌, 심지어 자동차 번호판 숫자도 오락가락한다. 패스워드를 잊어버려 접근 못하는 인터넷 웹사이트가 한둘이 아니다. 증세가 수상하지만 치매가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하나 있다. 55년전 논산훈련소에서 받은 군번은 놀랍게도 아직까지 생생하다. 잠꼬대로도 “1두마리 새륙 7805”를 복창할 수 있다.
군번만이 아니다. 까마득한 옛날 30개월 군대경험이 최근 30년 직장경험보다 뇌리에 더 또렷하다. 대학졸업 후 느지막이 입대한 나는 중구 필동에 있던 악명 높은 수도경비사령부(현 관악구 수도방위사령부) 직할 헌병대에서 복무했다. 얻어맞지 않은 날이 손가락으로 셀 정도다. 한겨울 한밤중에 팬티바람으로 얼어붙은 연병장 땅바닥에 드러눕는 기합도 받았었다.
근래 ‘군사경찰’로 명칭이 바뀐 헌병은 실제로 ‘새병’이다. 군복은 칼날처럼 각지고, 군화와 헬멧은 파리가 낙상할 만큼 반짝거려야한다. 벨트 버클에 얼굴이 비쳐지지 않으면 얻어터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옷 태가 나지 않는 나는 사무실에서 타자기나 두들기는 행정병이었다. 순찰소대원들이 저희들 잘못으로 기합 받을 때 애먼 행정병들도 도매금으로 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허구한 단체기압에서 당연하게 빠지는 녀석들이 있었다. 소위 ‘DP’조와 영창 간수병들이다. DP는 ‘Deserter Pursuit’의 약자로 ‘탈영범 체포조’다. 민첩하고 힘세고 ‘깡’좋은 무사들로 사복차림에 머리를 기르고 권총도 휴대했다. 체포한 탈영병을 영창에 집어넣으려고 귀대할 때만 만날 수 있었다. 하긴, DP조도 실적을 못 올리면 부대로 불려와 기합을 받았다.
DP조는 영외생활을 해도 순찰병보다 더 고달팠다. 탈영병을 잡기 위해 부모 집이나 애인 집 근처에서 무한정 잠복근무한다. 굶기를 밥 먹듯 하며 눈비 속에 밤을 새우기도 한다. 해당 병사와 가족들로부터 악마라는 저주를 받기 일쑤다. 자기가 잡은 탈영병이나 휴가 미귀자들이 영창에서 개돼지 같은 모욕과 체벌을 당하는 모습을 볼 때 연민의 정을 느낀다고도 했다.
고전명화 ‘지상에서 영원으로’가 탈영병 얘기다. 하와이 주둔 프랭크 시나트라 일병이 탈영으로 몰려 악질 영창반장 어네스트 보그나인에게 늘씬하게 얻어맞고 동료 몽고메리 클리프트 이병의 품에서 숨진다. 보그나인을 죽여 복수하고 탈영한 클리프트는 애인 집에 숨어있다가 일본군의 진주만 폭격 소식을 듣고 자진귀대 도중 동료 보초병의 오인 총격을 받고 숨진다.
‘콜드 마운틴’도 탈영병을 다룬 명화다. 남군 부상병 주드 로가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와 애인 니콜 키드먼과 재회하지만 추적한 DP와 결투 끝에 함께 죽는다. 한국에서도 탈영병 영화가 나왔다. 이영훈과 진이한이 공연한 이송희일 감독의 ‘추적’이다. 아예 ‘DP’를 제목으로 단 탈영병 영화도 곧 나올 모양이다. 만화가 김보통의 군대 웹툰인 ‘개의 날’이 원전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탈영병은 항상 있었다. 한국 공식집계에 따르면 2011~2015년 사이 군사재판에 회부된 탈영병은 총 2,559명이었다. 하루 평균 1.6명꼴이다. 탈영이유 중엔 “군대생활 염증”이 압도적으로(73%) 많았다. 대민봉사 출동 날 일행에서 슬그머니 탈영한 후 동네 극장에 들어가 태연하게 ‘아벤저스’ 영화를 관람한 공군 이병도 있었다. 기합이 완전히 빠졌다.
기합의 ‘기’자도 모를 육군졸병이 요즘 한국사회를 들쑤셔놓고 있다. 추미애 법무장관의 아들 서 모 카투사 일병이다. 그는 ‘엄마 빽’으로 정규 휴가일수보다 두 배 넘게 집에서 지냈다. 내가 헌병대에서 배운 바로는 두말할 나위 없이 탈영이다. ‘있어야할 시간에 있어야할 장소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당은 ‘빽’ 주인인 추미애를 감싸고 두둔하느라 제정신이 아니다.
DP가 서일병을 잡으려고(그럴 리 없지만) 그의 집에 출동했더라면 “너희들,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면박을 받았을 터이다. 영창에 붙들려오는 탈영병들은 대개 온순하고 나약하다(강인하면 탈영 않는다). 삼복더위가 다 지났지만 엄마 빽이 없어 집 안방이 아닌 헌병대 감방에서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서 일병을 부러워할 탈영병들에겐 매일 매일이 ‘개의 날’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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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