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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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갯불과 그녀

2020-09-19 (토)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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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잠이 들려는데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아주 약한 번개인지 뒤따르는 천둥소리는 들리지 않고 번개만 간헐적으로 거의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비가 부슬거리는 가운데 잠깐씩 폭우가 쏟아지기도 했다. 아직 한 뼘도 자라지 못한 상추 모종이 걱정되었다. 상추 잎이 워낙 여려서 저렇게 쏟아지는 비를 견딜 수 있으려나 싶어 뒤척거리고 있었다.

창 밖을 내다보니 번개 빛 틈서리로 채소 모습이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곤 했다. 암흑 속에 잠들어 있던 것들이 번개가 치는 순간에만 생명을 받아 살아났다가 스러지는 듯한 환각. 비록 찰나에 불과하지만 번개는 마치 생명을 살려내듯 초록을 간헐적으로 보여주었다. 마술 같은 순간이었다. 번개의 날카로움으로, 견고하던 내 어둠에도 균열이 가는 듯했다. 나는 그 균열된 틈서리에서 마침내 숨이 터져 나오는 느낌이었고, 후련했다.

인생은 번갯불 같다는 비유를 떠올리며 찰나에 의미를 두는 우리 삶을 생각했다. 번개가 치기를 기다렸다가 잠깐의 빛 속에서 상추가 온전한지 확인하려 애를 쓰면서, 암흑 속에 존재하는 그 나머지 시간은 부정(不定)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둠에 가려 보이지는 않아도 분명히 상추는 그곳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번개가 치지 않는 동안에는 존재마저 사라진 듯한 착각. 어쩌면 인간도 그렇게 반짝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전부라고 착각하며 사는 게 아닐까 싶었다.


서른 중반 즈음, 내 삶에 큰 영향을 준 동료 교사 둘을 만났다. 성향이 서로 달라도 많이 다른 둘 중에서 내 관심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하선생의 말을 비중 있게 여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 선생은 활발하고 거침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성격인 반면, 차 선생은 말이 없고 진중한 성격이었다. 특별한 학생을 다룬 사례나 학교 전반에 걸친 일에서부터 살림하는 법이나 시부모님 대하는 법에 이르기까지 그녀와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하는 사이, 하 선생은 어느새 내 삶의 테두리에서 중심부로 옮겨와 있었다. 그녀는 가을에 아이를 낳았는데, 출산휴가가 겨울방학과 학년말로 이어져 이듬해 봄 무렵까지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차 선생과 나는 자연스럽게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둘 다 말이 없는 편이어서 처음에는 어색할 만큼 하선생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서로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이야기를 내놓을 정도가 되었다. 언어를 통해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녀 안에 잠재하는 능력과 성숙한 인품을 발견한 그때부터 내게 그녀는 빙산이라는 이미지로 남았다. 수면 위로 드러난 그녀의 일부분을 전체로 착각한 나의 무지가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말을 아끼는 사람의,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이면’을 존중하는 법을 가르쳐준 인물도 그녀였다.

그 후, 열을 알면서도 하나를 말하는 사람과 하나를 알면 열을 말하는 사람을 수없이 만나며 황혼에 이르렀다. 어떻게든 자신을 드러내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알토란 같은 속내를 침묵으로 키우는 사람을 드물게 만날 때면 그녀를 본 듯 반가웠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목소리나 표정에 쉽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확고한 논리와 소신을 따르면서도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몸에 밴 그녀였다.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지의 잣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말하지 않은 부분에 대하여 함부로 단정짓거나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새벽 번개가 번쩍일 때 그 찰나의 빛 속에서 나는 차 선생을 보았다. 그녀와의 만남은 짧았으나 우리가 나눈 시간은 내 안에 길게 남았다. 그녀 집을 방문했던 그 해 겨울, 거실 가득 꽂혀있는 양서는 부러움 이상이었다. 그녀를 만난 지 삼 년 만에 드러난 음식솜씨는, 오랜 세월 손끝에서 익은 맛으로 섣불리 흉내 낼 수 없는 정도였다. 우리는 서로 수업이 없는 시간이면 같이 읽은 책과 세상을 이야기하며 깊이를 더해갔고 시절인연이 다하자 헤어졌다.

길지 않았기에 더 소중한 시간으로 기억되는 그때를 번개 속에서 만난다. 번개 칠 때만 드러나는 초록이 전부가 아니듯, 보이지 않는 것의 의미를 알려준 그녀 같은 사람이 그립다. 어디 그런 사람 또 없을까. 아니,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을까.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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