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공동체 위협하는 악성 ‘디나이얼리즘’

2020-08-26 (수) 조윤성 논설위원
작게 크게
우리를 위험과 불안에 빠뜨리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현실을 부정(否定, 디나이얼)하는 반응을 먼저 보인다. 이런 반응을 통해 우선 상황 파악에 필요한 시간을 얻는다. 그러면서 더 많은 정보를 접하게 되면 점차 이에 적응하고 합리적으로 대응하게 된다.

진화학자들은 초기 인류가 ‘부정’이라는 자기기만 기제를 통해 죽음을 비롯한 공포들을 억누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현실에 대한 부정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사례들이 있기는 하다. 낙천적인 암 환자들은 그렇지 않은 환자들보다 오래 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부정이 오히려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는 사례들은 훨씬 더 많다. 흡연 관련 연구결과들을 애써 무시하면서 담배를 계속 피우는 경우 등이다.

부정이 개인차원을 넘어 어떤 무리의 태도로 나타날 때 그것은 ‘디나이얼리즘’(denialism)이라 부를 수 있다. 디나이얼리즘이 위험한 것은 몰사실성에 더해 이것이 내재적으로 갖고 있는 파괴적인 성격 때문이다. 잘못된 인식이 집단적 사고로 형성되면 그것은 공동체의 합리적인 상식을 위협하는 흉기가 된다.


1999년부터 2008년까지 남아공 대통령을 지낸 타보 음메키는 엉터리 디나이얼리즘에 흔들리는 바람에 수많은 에이즈 환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음베키에게 영향을 미쳤던 디나이얼리즘은 “에이즈와 HIV 간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UC 버클리 분자생물학 교수 피터 듀스버그의 주장이었다. 이 주장에 혹한 음베키는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 프로그램 도입을 주저했다. 그의 이런 우유부단한 태도 때문에 살 수 있었음에도 목숨을 잃는 사람은 무려 33만 명으로 추산된다.

디나이얼리즘은 영역을 가리지 않고 기승을 부린다. 비단 과학의 영역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역사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홀로코스트 디나이얼리즘’이 대표적이다. 무수한 증언들과 자료를 통해 역사적 사실로 확인된 만행조차 뻔뻔하게 부인하는 일본 극우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홀로코스트 디나이얼리즘은 법원의 심판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는 디나이얼리즘이 쉬 소멸되지 않는 데는 테크놀러지의 영향이 크다. 과거 같았으면 국지적인 영향권에 머물렀을 디나이얼리즘이 이제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타고 공간과 시간의 제약 없이 바이러스처럼 마구 퍼져나간다. 온라인 공간이 이들에게 엉터리 주장들을 쏟아내는 연단을 제공해주고 있는 셈이다.

근거 없는 믿음과 소신에 근거한 디나이얼리즘이 종교적 분위기가 강한 지역에서 한층 더 맹위를 떨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코로나19의 실체를 부정하거나 방역수칙을 거부하는 미국인들의 비율은 남부 바이블벨트 지역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지금 한국사회를 코로나19 대혼란 속에 빠뜨리고 있는 것도 이런 무지한 디나이얼리즘 세력이다. 코로나19 대확산의 기폭제가 된 것은 최근 극우세력 주도로 광화문에서 열린 군중집회였다. 집회를 주도한 극우목사는 코로나19의 위험성을 줄곧 부정해온 인사다.

그는 자신의 교회를 중심으로 대거 확진자가 나오자 “북한의 바이러스 테러에 의한 것”이라고 엉뚱한 주장을 폈다. 결국 그 자신도 코로나19에 감염됐다. 그는 입원한 상태에서도 자신의 양성 판정을 믿지 않는다며 추종자들을 상대로 음모론을 늘어놓았다. 이런 정신 나간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답답함을 넘어 분노가 절로 치민다.

아주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의 부정 메커니즘은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기능을 했다. 설사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었다 해도 그에 뒤따르는 위협과 위험은 자신과 가족에 국한됐다. 하지만 모두가 서로 밀접하게 얽힌 채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코로나19 재확산에서 보듯 무책임한 디나이얼리즘, 특히 정치지도자 등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무지는 공동체 전체를 심각한 위험에 노출시킨다.

현실부정과 어리석은 선택에 의해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것은 개개인의 자유이겠지만, 다수의 안전과 생명이 소수의 디나이얼리즘에 의해 위협받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공공 악이라는 차원에서 가차 없이 단죄하는 게 마땅할 것이다. 여기에 관용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