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유권자들의 짧은 기억력

2020-08-12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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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대선이 채 3개월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민주당의 조 바이든이 승기를 잡아가고 있는 모양새이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상대인 트럼프에 상당한 차이로 리드하고 있으며 이 같은 리드는 견고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현 상황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과 불안도 점점 커지고 있다. 절대 다수가 미국이 통제 불능에 빠졌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으며 현재 상황에 만족한다는 사람은 19%에 불과하다.

여러 계량적 증거들과 역사적 선례는 바이든의 승리와 트럼프의 패배를 가리키고 있다. 문화전쟁을 통해 골수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방식으로 승부를 뒤집어 보겠다는 전략도 반인종차별 정서가 확산되면서 기대만큼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바이든 쪽으로 승부의 추가 점차 기우는 듯하자 그를 상대로 한 훈수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현재의 지지율에 도취되는 일 없이 크게 뒤지고 있다는 자세로 캠페인을 벌여야 한다는 지적에서부터 트럼프의 도발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조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트럼프가 거짓말을 동원해 공세를 펼칠 것이 불 보듯 뻔한 후보토론회에 결코 응해서는 안 된다는 구체적인 훈수까지 나온다. 한마디로 부자 몸조심하듯 처신하면서 트럼프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말라는 얘기들이다.


하지만 낙관은 절대 금물이다. 정치에서 3개월 후를 내다본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고도 위험한 일이다. 흔히들 정치를 살아있는 생물에 비유하는 것은 무수한 요소들이 뒤얽혀 작용하는 너무나도 변화무쌍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유권자들의 정치적 결정 또한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 될 예측난망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선거의 속성, 좀 더 넓게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이 있다. 인간의 기억 저장용량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 보니 당연한 얘기지만 오래 전 일보다는 최근의 일을 보다 더 선명하고 또렷하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최신효과’(recency effect)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이런 ‘최신효과’가 강력하게 작용하는 곳이 바로 정치다. 국민들은 무수한 정치적 상황을 겪고 목격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가지만 알게 모르게 이런 의견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최근의 경험들이다.

그렇게 볼 때 대선 직전인 10월의 미국 상황이 11월에 치러지는 선거 결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10월의 상황과 관련해서는 몇 가지 변수가 존재한다. 코로나19 백신개발 여부가 그 가운데 하나다.

트럼프 행정부는 ‘옥토버 서프라이즈’라 지칭하며 10월 백신개발에 총력을 쏟고 있다. 제약회사들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지원하면서 백신개발을 독려하고 있는 것은 현실적으로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카드가 이것 외에는 별로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지금은 트럼프의 코로나19 대응에 비판과 비난이 쏟아지고 있지만 만약 백신개발이 이뤄진다면 여론의 흐름에 큰 변화가 생길 수 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경제상황이다. 경제는 항상 대선에 주요변수가 돼 왔지만 이념적 양극화가 극심해지면서 그 영향력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였다. 하지만 코로나19로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경제상황은 또 다시 유권자들의 표심을 가를 수 있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커졌다. 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에 경제지표가 호전된다면 트럼프로서는 반전을 노려볼만한 회심의 카드로 써먹을 수 있다.

유권자들의 기억은 생각보다 길거나 종합적이지 않다. 유권자들은 파노라마가 아닌 스냅 샷을 떠올리며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강하다. 지난 한국 총선에서 여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둔 것은 야당의 실책도 있었지만 선거 즈음 한국의 코로나19 방역이 국제사회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선거가 끝난 후 여당 지지도는 크게 하락했다. 이렇듯 선거는 그 시점의 단기적 상황이 결과를 좌우하는 경우들이 많다.

지금은 과반수의 유권자들이 트럼프의 4년, 특히 코로나19 대처에 부정적 생각을 드러내고 있지만 이런 흐름이 선거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리란 보장은 없다. 그렇게 자신하기에는 여전히 많은 변수들이 존재한다. 팬데믹을 규정하는 단어 한 가지를 꼽으라면 단연 ‘불확실성’이다. 그러니 팬데믹 속에서 치러질 대선 결과 역시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상황이 바뀔 가능성은 얼마든 있다, 트럼프가 플레이어라면 더욱 그렇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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