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판은 서태평양 북 마리아나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이다. 이 섬을 처음 발견한 서양인은 마젤란 선단의 선원들로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스페인 소유였던 이 섬은 1898년 미서 전쟁에서 스페인이 지면서 미국으로 넘어갔다 독일을 거쳐 1914년 제1차 대전이 터지자 일본의 차지가 된다.
망망대해 한 가운데 있는 보잘 것 없는 섬이었던 이곳은 사탕수수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약 보물단지로 떠오른다. 이곳 개발을 맡은 남양흥발이란 회사는 일본 본토는 물론 오키나와와 한반도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을 모집해 대규모 농장을 건설한다. 1920~30년대 배고픔에 시달리던 많은 한국인들이 “연중 따뜻하고 먹을 것이 넘친다”는 달콤한 약속에 넘어가 사이판으로 가는 배를 탔다.
그러나 막상 배에서 내린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뙤약볕이 내려쬐는 황무지에서의 중노동이었다. 먹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마실 물이 없어 누가 오줌을 누면 그걸 마시겠다고 싸움이 벌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자 이들은 강제로 군노무자로 징집됐다. 이들은 변변한 장비도 없이 중노동으로 비행장을 건설하고 미군 폭격으로 부서지면 재건하는 작업을 반복해야 했다.
1944년 6월15일부터 7월9일까지 계속된 사이판 전투는 태평양전에서도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로 꼽힌다. 이곳에서는 ‘수퍼 요새’로 불린 미 B29의 일본 본토 폭격이 가능하기 때문에 미국이나 일본 모두 이곳을 갖기 위해 필사적인 싸움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3만명의 일본군 중 포로가 된 사람은 921명에 불과했고 당시 섬에 살고 있던 3만 명의 민간인 중 2만 명이 사망했다. 이 중 1,000명은 전원 옥쇄하라는 일본 정부의 명령에 따라 절벽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이들이 몸을 던진 ‘자살 절벽’과 ‘만세 절벽’이 유적지로 남아있다.
사이판 남쪽 티니안 섬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8,500명의 일본군 수비대 중 313명만이 살아남았고 한국인 2,700명을 포함한 1만5,000여 민간인 대부분이 사망했다. 이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절벽에서 뛰어내렸고 이를 거부한 사람들은 사살됐다.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이곳에 제2차 대전 중 최대 규모의 항공 기지를 건설한다. 섬 전체가 거대한 비행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945년 8월6일 이곳에서 인류 최초의 전투용 우라늄 원자폭탄인 ‘리틀 보이’를 실은 ‘에놀라 게이’가 뜬다.
그 날 히로시마에 도착한 이 폭격기를 본 일본 방위대는 경계경보를 울렸으나 곧 취소하고 만다. 폭격할 때는 수십대가 동시에 뜨는 것이 보통인데 이 날은 에놀라 게이 한 대와 원폭 투하 장면을 찍기 위한 비행기 2대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들 비행기가 현장을 뜬 직후 천지를 찢는 굉음과 함께 히로시마는 불바다로 변하고 히로시마 전체 인구의 1/3인 7만 명이 즉사했다. 그 후 방사능 후유증으로 죽은 사람까지 합치면 총 사망자는 13만으로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사흘 뒤인 8월9일 이번에는 플루토늄 원폭인 ‘팻 맨’을 실은 ‘박스카’가 역시 티니안에서 뜬다. 이번에는 군수공장이 모여있는 고쿠라가 목표였으나 당일 이곳에 짙은 구름이 끼는 바람에 방향을 틀어 나가사키가 애꿎은 희생양이 된다. 이곳에서도 8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기막힌 것은 이들 희생자 중 상당수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군수 공장과 군 기지에는 강제로 끌려온 한국인 노무자와 가족들이 많았다. 천리타향에서 억울하게 죽은 이들 숫자는 일본 추산으로는 1~2만, 실제로는 그보다 몇 배에 달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티니안에 비행장을 건설한 것도, 거기서 떠난 미군 폭격기에 희생된 것도, 사기와 강압으로 끌려운 한국인이었다는 것은 가슴을 칠 비극이다.
오는 15일로 한국이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광복을 찾은 지 75년이 된다. 조선 위정자의 무능과 부패로 나라를 빼앗긴 후 35년 동안 한국 국민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티니안과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비극은 그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역사를 기억하는, 깨어있는 국민만이 후손들이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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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