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딸 가진 남자’란 변명

2020-08-04 (화) 12:00:00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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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신문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한 선배가 남자기자들의 거칠고 ‘야한’ 농담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지 조언해주었다. 미혼의 여기자가 함께 웃고 즐기는 것은 적절치 못하니 웃지도 말고, 대꾸도 말고, 포커페이스로 표정관리를 하라는 것이었다.

80년대 편집국은 남자들의 세계였고, 성희롱보다 훨씬 도가 지나친 음담패설이 횡행했으며, 드넓은 편집국엔 언제나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지금 돌아보면 ‘야만의 시절’이었는데, 이후 수십년에 걸친 사회 변화의 물결을 타고 현재와 같은 ‘문명세계’로 진화해온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변화가 있었어도 오랜 세월 변하지 않은 것이 그것이다. 직장에서 성차별적, 외설적 발언을 들었을 때의 대처방법. 웃지 말고 대꾸도 말고, 무시하거나 못 들은 체하기, 정 화가 나면 째려보는 눈길로 경고를 보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여성의 취업과 사회·정치참여는 놀랄 만큼 성장했다. 1990년 미국 연방의회에서 여성의원의 수는 하원 29명, 상원 2명이었는데 현재는 하원 101명(23.2%), 상원 25명(25%)으로 3.5~10배 많아졌다. 미국보다 진보적인 유럽의 경우 여성의원과 장관의 비율은 거의 절반에 이른다.


이렇게 세상이 달라졌어도 많은 남자(man)들은 여자(woman)를 직장동료로 보기보다는 여성(female)으로 본다. 그리고 어떤 남자들은 똑똑한 여성이나 자기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여자를 무시하고 싶을 때 흔히 이름 대신 욕(이x, 저x, 개x, 미친x)을 사용하며 폄하한다. 하지만 대다수 여자들은 이를 면전에서 듣지 않는 한 거의 반응하지 않는다. 이제껏 가장 많은 욕을 먹은 미국여성은 2016년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일 것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bitch‘라는 욕을 수백만번 들었지만 한 번도 이에 대응하지 않았다. 그녀뿐 아니라 낸시 펠로시와 엘리자베스 워런을 비롯한 최고위직 여성정치인 모두가 그렇게 처신한다.

그런데 최근 한 여성하원의원이 여기에 정면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일어섰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Alexandria Ocasio-Cortez), 28세때 최연소 기록을 세우고 당선된 초선의원, 이름이 길어서 AOC란 약자로 불리는 그녀가 얼마전 10분간의 의회연설을 통해 정치계와 여성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스토리는 이렇다.

지난 7월20일, 국회의사당 계단에서 65세의 백인남성 하원의원 테드 요호(공화)가 딸 뻘의 라틴계여성의원 AOC(민주)를 마주치자 “역겹다”(disgusting)고 공격했다. 그녀가 며칠전 발표한 범죄와 빈곤의 상관관계에 관한 발언이 “미쳤고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돌아서면서 “Fucking Bitch!”를 내뱉었고, 그 욕을 의회전문지 ‘더힐’ 기자가 들었다.

이 욕설이 문제가 되자 이틀 후 요호 의원은 사과를 했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만약 그렇게 들렸다면, 그래서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면 미안하다. 45년 결혼생활에 두 딸을 가진 사람으로서 나는 언어 사용에 매우 신중한 사람이다.”

전에는 이 정도 선에서 사태가 마무리됐다. 사과가 진심이 아닌걸 뻔히 알지만 더 이상 문제 삼아봐야 달라질게 없으니 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AOC는 그러지 않았다. 욕 때문이 아니라 사과 내용에 꼭지가 돌았다고 했다. 다음은 그녀의 23일 의회연설을 뼈만 간추린 것이다.

“저는 요호 의원의 ‘발언’에 상처받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일이 아니니까요. 전에 바텐더로 일했을 때나 지하철을 탈 때, 거리를 걸을 때 이런 종류의 말을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 그게 바로 문제입니다. 양심의 가책 없이 성차별적 발언을 일삼는 남성들이 용인되는 문화 말입니다. 요호 의원의 사과는 필요하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불만인 것은 자신의 형편없는 행동을 변명하기 위해 아내와 딸을 방패막이 삼는 것입니다. 딸이 있다고 해서 좋은(decent) 남성이 되는 건 아닙니다. 아내가 있다고 좋은 남성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을 품위와 존중으로 대할 때 좋은 남성이 됩니다. 그리고 좋은 남성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최선을 다해서 사과합니다.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잘못과 그로 인한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관심있는 사람은 유튜브에 올라있는 영상을 한번 보면 좋겠다. 얼마나 차분하고 품위있게, 명료하고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또박또박 잘근잘근 씹으면서 논지를 펼쳐나가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연설을 두고 LA타임스와 뉴욕타임스 등 주류언론은 “이제껏 본 최고의 동영상” “역사에 남을 명연설”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여성주의 연설”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여성비하 발언을 일삼는 트럼프에게도 두 딸과 세 명 째인 아내가 있다. 박원순 전 시장에게도 딸과 아내가 있었다. 2년전 대법관 청문회에서 성희롱추문으로 곤욕을 치렀던 브랫 캐버노는 대놓고 “두 딸이 있는 사람”이라며 읍소했다. 성희롱 고발이 불거질 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나도 딸 가진 남자”라는 변명, 이젠 좀 안 듣고 싶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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