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납량특집

2020-07-02 (목) 09:21:46 이현주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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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스티븐 킹을 읽고 있다. 공포영화들도 보고 있다. 날씨가 더워질수록 무서운 것을 보고 싶어하는 취향은 초등학생 때 생겨난 것으로, 90년대 여름 밤에 “전설의 고향”이나 “토요 미스테리”를 보고 잠을 설치던 날들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취향과는 별개로, 나는 남들보다 두 배는 겁이 많은 성격이다.

어릴 적 살던 아파트 단지의 노인정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동네 주민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는 강좌가 있었다. 노인회 회장님께서 훈장님을 하셨는데, 입담이 좋으셔서 꽤 인기가 많았다. 호응에 힘입어, 어느 날 수업에서 한창 신나게 복수귀가 나오는 중국 고사를 이야기하며 박진감 넘치게 스스로 목 조르는 연기를 하셨는데, 초등학생 한 명이 엄청난 비명을 지르며 노인정 문을 박차고 도망가버렸다. 그게 나였다. 덕분에 동네 겁쟁이로 유명해졌다. 가끔 길에서 모르는 어른이 엄마와 나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아, 그때 귀신 이야기 듣다가 도망간 애죠? 정말이지 별로 무서운 이야기도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꿋꿋하게 무서운 걸 본다. 비록 새벽 세시에 스티븐 킹 소설을 읽다가 잠자는 남편을 두드려 깨우고, 자다가 툭하면 가위에 눌리더라도. 무서운 것을 남보다 스무 배 정도 싫어하는 남편은 납량특집 기간의 가장 큰 희생자다. 그가 아무리 버티더라도 6월부터 9월 사이에 적어도 두세 편의 공포영화를 함께 봐줘야 할 운명인데, 혹시 실수라도 저질러 사과할 일이 생기면 다섯 편 정도는 봐야 할 수도 있다. 코로나 유행으로 딱히 휴가 계획을 세워 두지 않은 이번 여름은 특히 힘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기에, 조금 체념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무서운 것을 보는 이유는, 오히려 현실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정말 그런 이유라면, 겁쟁이일수록 무서운 것을 열심히 보는 것이 논리적으로 올바른 지도 모른다. 무서운 것을 볼수록 지금 내가 안전한 곳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귀신이 튀어나올 때 비명은 좀 지르겠지만, 잔뜩 끌어당긴 옆사람의 팔뚝은 따뜻하고 생생해서, 맘 놓고 무서움을 즐기는 것이다. 놀이기구의 안전벨트 같은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약간 문제가 생겼다. 뉴스가 더 무서울 때가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무서운 현실에는 안전벨트가 없다.

<이현주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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