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콜클래식] 살로메와 ‘7베일의 춤’
2020-06-26 (금)
이정훈 기자
‘7베일의 춤’은 오페라를 빙자한 스트립 쇼였다. 더 쇼킹한 것은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르고 피범벅이 된 얼굴에 입을 맞추는 살로메의 모습은 시체와의 성행위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는데 광기, 변태가 판을 치는 ‘살로메’는 당연히 공연 하루 만에 극장에서 퇴출당할 수 밖에 없었다. 1907년 뉴욕 공연에서의 일이었다. 이 작품은 당시 세계 1위의 도시 뉴욕에서조차 1934년까지 다시 극장에 오르지 못했는데 1905년 드레스덴에서의 초연도 사정은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기독교도들의 반대 집회로 공연이 지연되는 난리를 겪었고 런던 공연 등은 연속해서 무산됐다. 다만 유럽은 미국과는 조금 다르게 초연 이후 2년만에 50여 극장을 점령하는 선풍을 일으켰는데, 말러같은 지휘자는 20세기 최고의 천재적인 작품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요즘의 ‘살로메’는 그렇게 전위적인 작품이거나 퇴폐적인 작품 축에 들지도 않지만 ‘7베일의 춤’이 전라로 춤을 춰야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춤추고 노래하고 옷까지 벗어야하는 소프라노는 가장 죽을 맛이다. 아이러니는 소프라노들이 가장 도전해 보고 싶은 작품 중에 ‘살로메’가 상위 랭킹에 꼽힌다는 것인데 어려운 만큼 쏟아지는 찬사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 ‘살로메’ 가수들이 있었지만 노래와 춤, 연기 그리고 외모까지 받쳐주는 가수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래가 좋으면 연기가 처지고 연기가 좋으면 외모가 빠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2009년 샌프란시스코 공연(6월 20일, SF 오페라가 온라인으로 스트리밍한 바 있다)은 나쟈 미하엘(Nadja Michael)이 도전했지만 외모와 연기는 그렇다 치고 노래가 받쳐주지 못해 혼자서 기만 쓰다 말았다. 나쟈 미하엘은 수영선수 출신으로 스태미너, 몸매가 받쳐주는 전형적 살로메 가수였지만 메조 소프라노였다는 흠 때문에 음성이 리듬을 타지 못했다. 한마디로 죽 쑨 무대였는데 아이러니는 이 작품의 난이도를 감안하면 마냥 욕만 할 수도 없는 실정.
기원전 30년,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는 당시 미성년자(16세)로서 의부(義父) 헤롯의 지속적인 성폭행에 시달리던 성피해자였다. 어쩌면 살로메에게 있어 성자 요한이야말로 헤롯과는 다른, 가장 성스럽고도 또 다른 차원의 성적 대상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오스카 와일드가 각색한 ‘살로메’에서 살로메는 단순히 그녀의 어머니 헤로디아를 위해 요한의 목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사랑을 거절한 요한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요한을 원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때 충격적인 것은 그녀의 잔혹한 복수가 한 사람의 목을 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절망적인 사랑을 시체와 더불어 함께하는 시체 애호증, 요한의 목을 끌어안고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서 그녀의 절망을 극복해 나간다는 것이었는데 이 충격적인 장면에서 음악은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비애의 절정을 보여주며, 몰아적이고도 비이성적인 광기의 감동을 우리에게 선사해주고 있다.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는 1903년 베를린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연극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는데 즉시로 자신이 대본으로 옮겨 1905년 오페라의 완성을 보았다. 당시 38세였던 슈트라우스는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돈환’ 등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는데 한창 나이인 절정의 시기에 ‘살로메’를 발표하며 바그너의 대를 잇는 독일 후기 낭만파 거장의 탄생을 알렸다. ‘살로메’는 연극으로서 탐미주의의 결정판을 보여준 바 있지만 오페라에서 와일드의 탐미주의는 그다지 극으로 반영되지 못했고 또 음악으로서도 전위성이나 극적인 반전보다는 낭만주의 음악으로서 바그너풍의 연장선에 그치고 만다. 다만 탐미주의라든가 예술적 절정으로서 살로메가 하나의 오페라로서 그 가치와 대중 사이의 끈을 연결해 주는 것은 때때로 출연했던 노래와 연기력의 천재들 때문인데 R. 슈트라우스 조차 그의 한 평생동안 유일한 살로메는 오직 Aino Ackté(핀란드 출신으로 1907년 라히프찌히, 1910년 런던 코벤트 가든의 살로메 공연을 이끌었다)뿐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었다. 잘 연출된 ‘살로메’, 연기력과 가창력이 함께 한 ‘살로메’는 20세기 예술이 주는 도착의 광기, 그리고 그 광기가 퇴폐 예술로서의 하나의 소모품에 그치지 않고 찰나의 삶을 전율시키는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순간으로서, 그것은 미치지 않으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가장 이성적이어야할, 그리고 가장 미치광이들만이 할 수 있는 예술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캐서린 말피타노(Catherine Malfitano)의 ‘살로메’ 공연들을 추천하고 싶으며 그녀의 전성기를 장식했던 베를린 스테이트 오페라(1990년), 그리고 영국 코벤트 가든(1997년)의 작품이 YouTube에 나와있다.
<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