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제9 항소법원과 캘리포니아

2020-02-14 (금) 12:00:00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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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법제도는 한국처럼 3심제지만 대부분은 항소심이 최종심이 된다. 연방대법원에 올라가는 케이스가 연 7,000여 건에 달하나 대법원이 실제 심리하는 케이스는 100~150건 정도에 불과하다. 항소심이 최종 판결이 되는 이유다.

연방 항소법원은 지역별로 13개가 있다. 캘리포니아는 제9 순회 항소법원이 관할한다. 알래스카부터 하와이까지 서부지역 9개 주, 6,000만명을 관할하는 제9 항소법원은 관할지역이 광대할 뿐 아니라 논쟁거리가 되는 진보적인 판결로도 유명했다.

한 예로 ‘국기에 대한 맹세’(The Pledge of Allegiance)에 나오는 ‘하나님 아래’(under the God)라는 문구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려 미 전국에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위헌 판결은 연방대법원에서 뒤집어지긴 했으나 제9 항소법원이 이같은 리버럴 판결로 ‘명성’이 높았던 것은 한 때 재판부 구성에서 진보성향의 판사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제9 항소법원의 상근 판사는 지금은 29명이지만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9명 정도였다. 그러다가 지난 1978년, 민주당인 지미 카터 대통령 재임 당시 판사 정원이 10명 더 늘어났다. 카터 대통령은 재임 시 모두 15명의 판사를 임용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진보성향의 판사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게 된 연유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의 연방대법원’이라고 할 수 있는 제9 항소법원의 판사 구성이 최근 급속히 바뀌고 있다. 현재는 민주당 대통령 지명자가 16명, 공화당 지명자가 13명에 이른다. 진보 성향과 보수 성향 판사의 갭이 이처럼 줄게 된 것은 전적으로 트럼프 대통령 덕이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연말 2명의 판사를 더해 재임 3년 동안 벌써 10명의 제9 항소법원 판사를 지명했다. 공화당으로는 바로 전임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재임 8년간 지명한 판사가 3명에 불과했던 데 비하면 엄청난 숫자다. 게다가 트럼프는 종신직인 항소법원 판사에 이번 2명은 모두 40대를 지명했다. 트럼프 행정부에 일일이 반기를 드는 캘리포니아 주 민주당 정권의 제어를 공고히 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연방 항소심의 재판부는 무작위로 3명을 선출해 구성한다. 따라서 현재의 구성원만으로도 제9항소심은 전처럼 진보 성향 일색의 판결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게다가 올해 선거에서 트럼프가 재선된다면 항소심 판사들의 성향은 공화당 쪽으로 더 기울어져 캘리포니아의 사법 지형도가 바뀌게 된다. 3권 분립이긴 하나 미국은 주요 정책의 실행에 있어 행정부나 의회보다 사법부 우위의 성격이 강하다.

이 문제는 현재 요란한 정치적 이슈로 부각돼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점 때문에 올해 대통령 선거는 특히 캘리포니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선거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참고로 연방 항소법원에 ‘순회’(Circuit)라는 말이 들어가는 것은 케이스가 어느 지역에서 제기되느냐에 따라 재판부가 그 지역을 찾아가 심리를 하기 때문이다. 제9 순회 항소법원의 본부는 샌프란시스코에 있지만 시애틀, 포틀랜드 등에도 법원이 있고, 남가주와 애리조나에서 제기되는 케이스는 패사디나에 있는 법원에서 다뤄진다.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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