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리석은 사냥꾼

2019-10-15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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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춘추시대의 오나라와 월나라만큼 사자성어를 많이 만들어낸 나라도 드물 것이다. 대대로 원수지간이던 두 나라 사람이 한 배를 탔다는 ‘오월동주’, 월나라 왕 구천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장작 위에서 자고 쓸개를 핥으며 힘을 길렀다는 오왕 부차의 ‘와신상담’, 그리고 토끼 사냥이 끝난 다음에는 사냥개가 삶아진다는 ‘토사구팽’이 그것이다.

토사구팽은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한신이 유방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한 말로 유명하지만 그보다 먼저 월왕 구천을 보좌하며 오나라를 정벌한 범려가 이야기했다.

범려는 구천이 전쟁에서 이기자 “고통은 함께 할 수 있으나 영화는 함께 누릴 수 없다”며 낙향하고 같은 일등공신인 문종에게도 이를 권하지만 문종은 듣지 않고 관직에 남았다 결국 구천의 의심을 사 자결을 강요당한다.


200여년이 지난 후 한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창업 일등공신인 장량은 낙향해 목숨을 구하지만 한신은 권좌에 앉아 있다 역모로 몰려 처형되고 만 것이다.

지금 중동은 터키군이 시리아 북부로 진격하면서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트럼프의 터키의 독재자 에르도안과의 전화 한 통화 때문이다. 이 전화로 트럼프는 북부 시리아에 주둔 중인 미군철수 의사를 밝혔으며 이 전화가 끝나자마자 터키군은 시리아 진격을 감행한 것이다.

터키의 시리아 침공은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쿠르드 세력을 쓸어내기 위한 것이다. 터키와 이라크, 시리아와 이란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쿠르드족은 터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터키 남동부 지역에 살고 있으면서 호시탐탐 독립을 꿈꾸는 쿠르드는 터키 안보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라 보기 때문이다. 인구 3,000만에 달하면서도 주변 국가의 이해관계 때문에 독립 국가를 갖지 못한 쿠르드는 자기들만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간절한 소망이다.

쿠르드족이 미국에 요청에 따라 지난 수 년 동안 1만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며 시리아와 이라크 일대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IS를 퇴치하는데 결정적 공을 세운 것도 미국 편에 서면 언젠가는 미국이 쿠르드 독립 국가 수립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트럼프의 전화 한 통으로 헛꿈이 되고 말았다. 터키군은 시리아 북부를 장악한 후 쿠르드 병사들에 대한 학살을 개시했으며 다급한 쿠르드족은 지금까지 적이던 시리아의 아사드 정부군과 손을 잡고 터키군에 맞서고 있다. 쿠르드가 관리하던 수용소 내 수천 IS 테러 요원의 행방도 오리무중이다. 미군이 물러나면서 생긴 빈 공간을 아사드 정권의 친구인 러시아와 이란이 메우고 있다.

터키는 얼마 되지 않은 미군 병력의 조속한 철수를 강요라도 하듯 미군기지에 대한 폭격도 서슴지 않고 있다. 미국은 같은 나토 회원국인 터키 인시를릭 공군기지내 배치된 전술핵무기의 철수를 검토 중이다.

트럼프는 참모진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동의 ‘끝없는 전쟁’에 신물이 난다며 일방적으로 철군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이번 결정에 대해 트럼프라면 웬만한 일에는 깜빡 죽는 공화당 의원들까지 불만을 나타냈다. 가장 강력한 트럼프 옹호자의 한 명인 린지 그레이엄 연방 상원의원은 “이것은 트럼프 최악의 결정의 하나”라고 비난했다.


2011년 긴 이라크 전쟁에 지친 미국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오바마가 이라크에서 일방적으로 미군을 철군하면서 생긴 것이 회교 테러조직인 IS였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는 이런 결정을 내린 오바마를 비난했다. 그래 놓고 지금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결정은 그때보다 죄질이 더 나쁘다. 오바마는 그래도 쿠르드족을 이용만 하고 배신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IS가 재건되면 미국은 친구 없이 혼자 싸워야 할 것이다.

공을 세우고도 비참한 종말을 맞은 신하들에게 토사구팽은 엄청난 배신이겠지만 권력의 생리로 볼 때 불가피한 면도 있다. 유능한 권신은 외적의 침입을 막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그것이 사라진 후에는 군주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냥이 안 끝났는데 사냥개를 삶는 경우다. 주위에 토끼는 말할 것 없고 늑대와 살쾡이, 하이에나가 우글거리고 있는데 사냥개를 삶는 사냥꾼이 있다면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어리석다는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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