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동굴의 비밀

2019-10-01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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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리노 산즈 데 사우투올라는 스페인 북부 칸타브리아 지방에 살던 귀족이다. 전공은 법학이지만 고고학이 취미였던 그는 틈만 나면 유물 발굴을 위해 산과 들을 누비고 다녔다.

1879년 11월 어느 날 그는 8살 난 딸 마리아와 함께 알타미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정신 없이 땅을 파고 있던 그때 “아빠, 저기 좀 봐. 황소가 있어”라는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고개를 들어 위를 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은 충격에 빠졌다. 동굴 천장 가득히 수많은 동물들이 형형 색색으로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작품이 선사시대인들 것이라 확신하고 스페인에서 가장 권위있는 고고학자인 후안 빌라노바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동굴을 직접 답사한 빌라노바도 이에 동의했다. 이에 고무된 마르셀리노는 1880년 ‘산탄데르 지역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유물에 관한 소고’라는 논문을 통해 이런 내용을 발표한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당시 고고학계가 보여준 반응은 그야말로 적대적이었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고고학회에서 빌라노바가 이에 관한 발표를 하자 당시 고고학계 최고 권위자로 꼽히던 프랑스의 에밀 카르타이약은 아예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 후 카르타이약의 지시로 이 동굴을 방문한 에두아르 아를레는 그림의 수준이 매우 높고 색채가 너무 선명하다며 이는 도저히 구석기인의 작품이라 볼 수 없다는 보고를 올렸다. 마르셀리노는 그 후 10년 가까이 자신의 주장이 정당함을 호소하고 다녔지만 끝내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사기꾼 소리까지 들으며 1888년 57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하고 만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프랑스 남부에서 비슷한 동굴 벽화가 계속 발견되자 마르셀리노 비판에 앞장섰던 카르타이약은 1902년 ‘인류학회지’에 ‘회의론자의 반성문’이란 글을 쓰고 마르셀리노가 옳았고 자신이 틀렸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한다. 마르셀리노가 비통하게 죽은 지 14년만이다.

그 후 1940년 프랑스 남부 라스코, 1994년 쇼베에서 대대적인 동굴 벽화가 발견됨으로써 기원 전 3만2,000년에서 1만5,000년 사이 구석기인들이 위대한 예술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은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들 동굴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이다.

동굴 벽화 실물을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애석하지만 그 꿈은 접는 것이 좋다. 동굴을 일반에 개방하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이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가 벽화를 손상시킨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의 출입은 금지돼 있다.

그렇다고 절망할 것은 없다. 이들 동굴 옆에 그림을 복제한 박물관을 지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 알타미라 박물관에 가면 동굴처럼 꾸며놓은 전시실에서 이들 그림을 만나 구석기 예술가의 웅혼한 기상과 섬세한 터치를 엿볼 수 있다. 이 박물관 입구에 쓰여진 피카소의 “알타미라 이후의 모든 예술은 퇴보다”라는 말이 실감있게 다가온다.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근에 위치한 엘 카스티요 동굴에 가볼 것을 권한다. 발견된지 얼마 되지 않은 이 동굴은 아직까지는 일반에 개방돼 있다.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거대한 종유석 사이로 해설사가 전등을 비출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는 그림들은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동을 준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것 같은 데 이 그림은 1만5,000년 된 것이고 저건 2만5,000년 전에 그려졌다 한다. 이 그림과 저 그림 사이로 만년이 속절 없이 흘러 갔다.

평균 수명 30년에 하루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들었을 구석기인들이 왜 이런 정교한 그림을 수만 년에 걸쳐 수없이 그렸는지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서라는 설, 종교의식이 거행됐던 곳이라는 설 등 설만이 무성할뿐 진짜 이유는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고고학은 천문학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힘을 갖고 있다. 수만년의 세월에 비춰볼 때 일상의 소소한 걱정은 소소한 것임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일 것이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 발견 140주년을 맞아 구석기인의 삶을 새롭게 보게 해준 한 고고학자의 삶을 생각해 본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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