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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나의 마늘, 컴포트 우먼

2019-09-10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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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세상을 구현하고자 태백산에 내려와 신시를 지었더니, 이때 곰과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다. 환웅은 쑥과 마늘을 주며 동굴 속에 들어가 그것만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빛 한줄기 들지 않는 습기 찬 동굴에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마늘만 먹는 일은 단 하루도 참기 힘든 일이었으니, 호랑이는 얼마 못가 나가버렸고 곰은 이를 견디고 사람이 되었다. 그 웅녀가 아이를 가지기를 빌자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해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우리 한민족의 단군신화에서 마늘은 간절한 소원이고, 혹독한 시험인 동시에 기적을 일으키는 마법의 묘약이다. 그 웅녀의 마늘이 5천년 동안 한국 여성들의 간절한 소원으로 이어져 오늘까지 전해져왔다면 어떤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까?

최근 영어권의 재미 한인들이 만든 2편의 연극을 잇달아 보았다. 2017년 오리건 셰익스피어 연극제에서 호평 받은 ‘해나와 공포의 가제보’와 2015년과 2018년 뉴욕 연극계에서 화제가 됐던 위안부 문제를 다룬 뮤지컬 ‘컴포트 우먼’이 그것이다. 둘 다 기대 이상의 수준 높은 공연이었는데, 특히 ‘해나와 공포의 가제보’(Hannah and Dread Gazebo)는 깜짝 놀랄 만큼 재미있고 인상적인 수작이었다.


극본(박지혜), 연출(제니퍼 장), 배우 5명이 전원 한인 2세들인 이 연극은 뉴욕에서 살고 있는 재미한인가족이 할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에 한국으로 달려가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휴전선 부근의 노인요양시설에 살고 있던 할머니는 옥상에서 투신자살했는데 몸을 날린 쪽이 DMZ의 북한 쪽이어서 시신을 찾아오는 일이 간단치가 않다. 중요한 전문의 시험을 코앞에 둔 해나, 밴드가 해체돼버려 백수가 돼있는 남동생, 대학교수인 아버지, 그 와중에 가제보(정자)를 짓고 싶다는 엄마… 이들이 한국에서 갈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상황을 헤쳐가면서 좌충우돌하는 스토리가 스피디하고 코믹하게 전개된다.

‘이것은 소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This is a story about wish)로 시작되어 똑같은 멘트로 끝나는 이 연극은 웅녀의 마늘로 대표되는 한 개인의 소원이 가족의 소원이고 나라의 소원이며, 궁극적으론 인류의 소원이라는, 인간 잠재의식 깊은 곳에 묻혀있는 원시사회로부터 전해져온 공동체적 염원을 생각해보게 한다.

한국의 건국설화에서부터 남북문제, 한국과 미국의 언어 및 문화차이, 가족의 사랑과 고통의 극복, 거기에 미스터리와 매직까지…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이야기하느라 숨이 찬 느낌은 있지만 독창적인 스토리와 이를 리듬감 있게 풀어나간 연출, 연기들이 모두 나무랄 데 없이 좋았다. 중간 휴식 없이 한시간반 동안 완전히 몰입했던 공연이었다.

놀라운 것은 100석도 되지 않는 작은 극장이 만석을 이룬 모습이었다. 아시안 전문극단인 이스트웨스트 플레이어스(EWP)가 협업한 이 공연은 LA 한인타운에서 멀지 않은 노르만디와 파운튼의 소극장(Fountain Theatre)에서 9월22일까지 열리고 있는데, 지난 1일 일요일 2시 공연의 좌석이 거의 전부 백인 노인들로 채워졌다. 나 같은 한인 1세는 한명도 찾아볼 수가 없었고, 드물게 보이는 아시안 관객 역시 영어권의 노인들이었다.

한편 뮤지컬 ‘컴포트 우먼’(Comfort Women)은 한국에서도 다루지 못하는 민감하고 어려운 주제를 미국에서 용감하게 다뤘다는 점과 주류사회에 위안부 역사를 알리는데 큰 몫을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뮤지컬을 만든 김현준은 미국인들이 홀로코스트는 모두 아는데 위안부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예상했던 대로 이 공연은 보는 내내 힘들었다. 워낙 고통스런 내용이 2시간 가까이 이어지니 그 아픔과 긴장이 감정이입되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정통 뮤지컬이라고 하기엔 약간 아쉬운, 음악이 있는 연극이라 해야 할 공연이었지만, 대부분 한인 2세들로 이루어진 제작진과 배우들의 열정과 진지함에는 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타인종과 한인이 두루 섞인 관객 중에는 훌쩍이는 사람도 여럿 볼 수 있었다.

요즘 글로벌 사회의 화두이며 지향점은 ‘다양성과 포용’(Diversity and Inclusion)이다. 냄새나는 마늘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박수치는 미국 노인들, 극동의 작은 나라 여성들이 겪은 치욕의 역사에 눈물 흘리며 감동하는 타인종 관객들을 보면서 다양성과 포용의 현장을 느꼈다.

해나의 마늘이 위안부들의 상처도 치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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