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불매 운동의 허실

2019-08-06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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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매 운동’을 뜻하는 ‘보이콧’은 원래 사람 이름이다. 1880년 아일랜드에 흉년이 들자 마요 카운티 발린로브에 영지를 갖고 있던 에른 백작은 10% 렌트를 내려주기로 했다. 이것으로 성에 차지 않은 소작농들은 25% 감면을 요구했고 백작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분노한 지역 주민들은 백작의 영지 관리인이자 자신도 농지를 갖고 있던 찰스 보이콧과는 소작행위를 비롯한 일체의 거래를 하지 않기로 했다. 인근에서 일꾼을 구할 수 없게 된 보이콧은 멀리서 농부들을 데려와야 했으며 50명의 일꾼을 수송하고 보호하기 위해 1,000명의 군과 경찰이 동원되어야 했다. 그렇게 수확한 농작물을 판 가격이 500파운드인데 들어간 경비는 1만 파운드가 넘었다. 보이콧은 영어사전에 이름만 남긴 채 곧 그곳을 뜨고 말았다.

요즘 한국에서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하면서 일본상품 불매운동이 일고 있다. 이로 인해 올 6월까지 전년에 비해 판매가 17% 늘어나는 등 선전하고 있던 일본 수입차는 7월 들어 전달에 비해 32%, 전년에 비해서는 17% 줄어드는 등 급전직하하고 있다. 일본맥주 판매도 급감하고 있다. 일본정부의 수출 규제조치가 취해진 뒤 열흘 동안 일본맥주 판매 동향을 보면 7월 현재 19%가 줄어들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의류체인인 유니클로 매장 판매도 30% 줄었고 일본으로 여행 가려는 관광객 수도 30% 정도 감소한 것으로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한 연예인은 일본에 놀러가 찍은 사진을 자기 SNS에 올렸다 여론의 뭇매를 맞자 즉시 사과문을 실었다.

이 와중에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일식집에서 사케를 마신 사실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배제하기로 한 날 집권당 대표가 일식당에 가 점심을 먹는 것이 있을 수 있느냐며 “연일 반일, 항일 하더니 이율배반적 코미디”라고 논평했다.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측은 이 대표가 마신 사케는 ‘국내산 청주’라며 “일본식 음식점을 운영하는 우리 국민은 다 망하란 말이냐”고 맞섰다.

사케 논란은 한편의 코미디지만 이는 일정 부분 정부와 집권당이 자초한 것이다. 청와대와 집권당의 고위 인사들은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해 ‘죽창가’를 부르며 “제2의 의병을 일으킬 때”라고 연일 반일감정을 부추겼다. 거기다 민주당 싱크 탱크인 민주 연구원은 ‘한일 갈등이 총선에 호재’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만들어 돌렸다.

이 연구원은 한 여론조사를 토대로 한일 갈등이 악화하고 반일 여론이 일면 민주당 지지자들이 결집해 총선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란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쯤 되면 정부 여당의 반일 정서 고취의 진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일본의 억지에 분노한 국민들이 일본상품 불매 운동을 벌이는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그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 지는 의문이다. 이 운동이 확산되면 일본회사들도 타격을 입겠지만 대부분 대기업인 이들은 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상품을 수입해 먹고 사는 한국인 업자, 일본관광 가이드와 여행업체들은 생계가 위협받게 된다. 졸지에 생활수단을 잃게 된 이들이 입은 피해는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정부와 국민들은 이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일본상품 불매 운동이 일본경제에 미칠 영향은 둘 중 하나다. 효과가 미미하거나 상당한 효과가 있는 것이다. 효과가 미미하다면 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고 상당한 효과가 있다면 일본 정부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한국상품의 일본 수입을 막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뜩이나 어려운 한국경제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반일 감정은 더 악화할 것이고 일본물건을 사거나 쓰는 사람은 친일 매국노로 몰릴지 모른다. 그렇게 해 일본정부가 입장을 바꾼다면 그 길로 가야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일본은 좋건 싫건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웃으로 같이 살아야 할 나라다. 지금 상태에서 감정적 대응은 사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정부와 국민들은 냉정을 되찾고 무엇이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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