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비부인과 미스 사이공

2019-07-23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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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코모 푸치니가 1904년에 쓴 오페라 ‘나비부인’(Madam Butterfly)은 일본의 항구도시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미군장교와 현지처인 게이샤의 비극적 사랑을 그리고 있다.

100여년전 유럽에서는 ‘오리엔탈리즘’이라 하여 동양의 신비와 환상이 표현된 예술작품이 많이 나왔다. 고흐의 그림들에서도 볼 수 있고, 드뷔시의 음악(La Mer)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푸치니는 ‘나비부인’에서 일본 기생 이야기를, ‘투란도트’에서는 중국 공주 이야기를 그렸다.

당시 나가사키에 주둔하던 미군장교들은 일본 여성과 단기계약 결혼을 하고 현지처를 두는 일이 흔히 있었다. 그런데 이 오페라에서 나비 같은 열다섯살 소녀 초초상은 결혼하고 얼마 살다가 떠나버린 핀커튼 중위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굳게 믿고 아들을 키우며 일편단심 기다린다. 그러나 미국에서 다른 여자와 결혼한 그는 3년 만에 아들을 입양하러 아내와 함께 나가사키를 찾아오고, 충격 받은 초초상은 자결함으로써 짧은 생을 마감한다.


이 오페라의 뮤지컬 판이라 불리는 작품이 ‘미스 사이공’(Miss Saigon)이다. 시대와 무대만 바뀌었을 뿐 아시안 여성이 미군 GI에게 사랑이란 이름으로 이용당하는 이야기는 판에 박은 듯이 똑같다. ‘미스 사이공’은 1970년대 베트남 전쟁 중의 미해병 크리스와 시골서 갓 상경한 순진한 바 걸 킴의 이야기다. 하룻밤 사랑에 결혼식까지 올린 두 사람은 미국이 패전하면서 갑작스럽게 헤어지게 된다. 이후 3년 동안 킴은 갖은 고생 속에 아들을 키우며 크리스를 기다리지만 그는 미국에서 다른 여자와 결혼한 상태. 킴과 아들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크리스가 아내와 함께 찾아간 날, 킴은 총격 자살한다.
뮤지컬 ‘미스 사이공’이 지난 16일부터 할리웃 팬태지스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다. LA에서 공연되기는 무척 오랜만으로, 작년 9월 시작된 세 번째 미국투어의 일환으로 온 것이다. 10월에는 OC 시거스트롬 홀, 11월 샌호제 퍼포밍아츠 센터에서도 공연 일정이 잡혀있다.

잔잔한 오페라 ‘나비부인’에 비해 ‘미스 사이공’은 뮤지컬이니만큼 풍성한 음악과 춤, 다채로운 배역과 스토리라인이 두툼하게 덧입혀져 볼거리가 많다. 전쟁이 배경이라 훨씬 극적이고 역동적이며, 그중에서도 사이공이 함락될 때 무대에 헬리콥터가 등장하는 장면은 언제 봐도 화제가 될 만큼 스펙터클한 씬이다.

25년만에 리바이벌 된 프로덕션이라 기대가 좀 있었다. 특별히 새로운 것은 없었지만 화려한 세트와 무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음악이 귓전을 울렸다. 그러나 작품 자체에서 시대적 간극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게 불과 30년전에 초연돼 대히트한 뮤지컬인데도 지금 보니 상투성과 신파가 심하고, 나중에는 스토리가 늘어지면서 지루한 감마저 드는 것이었다.

게다가 주인공 킴 역(Emily Bautista)이 약해서 과거의 흥행을 재현하기란 힘들 것으로 보인다. 초연 당시 킴을 맡았던 필리핀 출신의 레아 살롱가는 이 작품 하나로 세계적인 스타가 됐을 만큼 엄청난 파워를 가진 가수였다. 불과 18세때 데뷔했는데 대단한 흡인력을 가진 노래와 연기로 ‘미스 사이공’의 전설이 되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떠나 ‘미스 사이공’을 보면서 크게 거슬렸던 것은 사이공과 방콕 환락가 여성들의 묘사였다. X등급이 넘는 선정적인 포즈와 장면, 애무와 성행위 묘사, 엉덩이와 가슴을 흔들어대는 장면들이 너무 오래 이어졌다. 히트 뮤지컬 중에 이렇게나 많은 아시안 여자들이 무대에 등장하는 작품도 없을 것인데, 열명도 넘는 여자들이 야하게 화장하고 극도로 천을 아낀 비키니를 입고 미군들과 얽혀 노골적이고 육감적인 동작을 해대는 장면은 눈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 내가 아시안 여자여서 거부감이 심한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옆에 앉았던 남자조차 “너무 심하다”고 투덜거렸을 정도였으니.

그러잖아도 ‘나비부인’과 ‘미스 사이공’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오리엔탈리즘에다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이라는 비난이 있어왔다. 성적 노리개인 아시안 여성, 그녀를 버리고 떠나가는 서양남자, 그리고 거기서 태어난 자식만 ‘꿈의 나라’ 미국으로 데려가준다는… 백인들 시각의 서구우월적인 기본설정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됐던 것이다. 글로벌 시대이고 미투 시대인 지금 이런 스테레오타입의 뮤지컬이 언제까지 환영받을 수 있을지 조금 궁금하다.

한국인 뮤지컬 배우 정진우가 비중이 큰 역(투이)을 맡았는데 노래와 연기 모두 훌륭했다. 공연은 8월11일까지.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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