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현실에의 백기 투항

2019-07-16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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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로 가장 큰 피해를 본 나라는 그리스다. 내세울만한 산업이라고는 관광밖에 없는 이 나라는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마이너스 25%라는 최악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실업률은 28%로 치솟았고 수십만 젊은이들이 해외로 이주했다.

경제가 침몰하면서 기존 정당은 몰락하고 극우파와 극좌파 정당이 기승을 부렸다. 와중에 나타난 것이 청년 공산주의자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이끄는 시리자였다. 금융위기 이전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이 정당은 2015년 집권 후 IMF 등이 요구한 구제금융안을 기각하는 주민 발의안을 표결에 부쳐 반대를 얻어냈다.

그러나 이 안이 통과된 지 1주일 만에 치프라스는 입장을 번복해 구제금융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IMF의 구제금융이 없다면 그리스 경제는 파탄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이해한 것이다.


그 후 3년이 지난 작년 여름 그리스는 IMF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졸업했다. 경제는 느리지만 지속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있고 실업률도 점차 낮아지고 있다.

이 와중에 실시된 지난 7일 총선에서 그리스 국민들은 치프라스를 축출하고 그와 정반대 성향의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를 신임 총리로 선출했다. 그리스 정치 명문가 출신인 미초타키스는 하버드를 졸업하고 투자은행에서 일한 경력이 있으며 좌파들이 증오하는 ‘신자유주의’ 사상을 신봉하는 인물이다.

그리스 국민들이 극좌파인 치프라스를 버리고 시장 친화적인 미초타키스를 택했다는 것은 희생과 고통 없이 모든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유토피아의 환상에서 깨어났음을 의미한다. 시장 원리를 무시한 정책은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비싼 대가를 치르고 배운 셈이다.

그리스에서 좌파 포퓰리즘이 한때 정치판을 휩쓸었다면 한국에서는 문재인의 소득주도 성장이 한동안 정부의 지도이념이었다. 노동자들의 소득을 올려주면 이들의 소비가 늘어날 것이고 이는 노동자들의 복지향상은 물론 경제성장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문재인 정부의 신앙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한국의 최저 임금위원회는 지난 12일 내년도 최저 임금을 올해보다 2.87% 올린 8,590원으로 정했다. 10년 만에 최저며 역대 3번째로 낮은 인상률이다.

이는 경제 성장률 전망치와 물가 상승률을 더한 수치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사실상의 임금 삭감이란 이야기가 나온다. 더군다나 정부는 올해부터 임금 산입 범위에 상여금과 복리 후생비를 넣기로 했다. 이를 감안하며 노동자들이 받는 혜택은 오히려 줄어든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와 함께 2020년은 물론이고 임기 내 시간 당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하겠다는 문재인의 선거공약도 물거품이 됐다.

문재인 정부가 선거공약 파기에 따른 노동계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지난 2년간 30% 가까이 최저임금이 오르면서 자영업자 폐업률이 사상 최고로 오르고 청년 실업이 악화하는 등 부작용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임금이 오르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은 고용주가 임금을 올려줄 여력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여력이 없는 고용주에게 정부가 이를 강요할 때 고용주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문을 닫거나 직원을 줄이는 것뿐이다. 지난 2년간 나온 각종 통계지표는 30% 인상이 무리였음을 의심의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최저임금을 올리는 것으로 노동자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면 30%가 아니라 300%라도 올려야 한다. 그러나 그 결과 돌아오는 것은 기업들의 줄도산과 대량 실업이란 것은 자명한 일이다.

스탈린과 모택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잘 사는 사회를 만들겠다며 사유재산을 없애고 수많은 사람을 강제노동 수용소에 보냈지만 그 결과는 수 천만 무고한 생명의 희생이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법칙에 복종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경제법칙을 존중하지 않으면 경제는 성장하지 않는다.

가격이 오르면 수요는 준다는 것은 경제의 기본법칙이다. 문재인 정부가 지금이라도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정책을 전환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기업 옥죄기와 주 52시간 근무제, 원전 폐기, 4대강 보 철폐와 같은 준비도, 검증도 되지 않은 정책들도 하루 속히 재검토하기 바란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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