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위기의 한국

2019-07-09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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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이전까지 한국에서는 반미 시위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것은 5.18 사태였다. 전두환이 1980년 광주 학살로 정권을 잡자 일부 국민 사이에서 이를 방관한 미국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주장이 일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일어난 것이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에서의 반미 시위는 다반사가 됐다.

이 반미 정서를 대선에 활용한 사람이 노무현이었다. 2002년 대선 캠페인 초반부터 “반미면 어떻습니까”라며 반미주의자들을 지지층으로 끌어들인 그는 그해 6월 경기도 양주에서 신효순과 심미선 등 2명의 여중생이 훈련 중이던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지자 이를 득표 전략에 이용했다.

그런 노무현도 대통령이 된 후에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 요청대로 이라크에 한국군을 파병했으며 역시 일부 시민단체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타결했다. 이 두 정책 모두 노무현이 좋아서 취했다기보다는 한국의 안보와 경제를 위해 미국과의 우호적인 관계가 필수라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노무현 일부 지지층의 정서가 반미라면 그 비서실장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문재인 지지자들의 가장 강한 감정은 반일이다. 이들은 일제의 패망 후 세워진 대한민국이 사실상 친일파의 나라이며 지금이라도 이들을 숙청하고 그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수많은 한국인들을 징용으로 끌어가고 수많은 여성들을 위안부로 잡아가고도 제대로 된 배상이나 사과가 없는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다. 그 결과는 건국 이래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한일관계다.

일본은 지난 주 한국 반도체와 스마트 폰, TV 제조에 필수적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고순도 불화수소, 리지스트 등 세 가지의 한국 수출을 금지했다. 일본이 세계시장의 90%까지 장악하고 있는 이들 부품의 대한 수출이 중단될 경우 한국의 주력 수출업종은 치명적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일본정부는 이 조치를 취하면서 ‘안보’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에 관한 판결에 대한 보복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작년 10월 대법이 일본 전범기업들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배상해야 한다고 판시하자 고노 다로 일본 외상은 “국제법에 기초해 한국정부와 맺은 협약을 한국 대법원이 아무 때나 뒤집을 수 있다면 어떤 나라도 한국정부와 일하는 게 어려울 것”이라며 “즉각 적절한 조치가 강구되지 않으면 … 모든 선택지를 시야에 두고 의연하게 대응을 강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보복조치 검토에 들어갔다고 봐야 한다.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1차적인 것이고 양국 현안이 외교적으로 타결되지 않을 경우 2차, 3차 보복이 잇따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이 과거사 문제를 무역과 연계해 보복한 것은 치졸한 짓이지만 국제정치는 현실이다. 같은 짓을 트럼프는 경쟁국인 중국은 물론 우방인 유럽과 캐나다, 멕시코, 한국에 대해 수시로 하고 있다. 그렇다고 트럼프를 비난해봤자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현재의 이익도 살펴야 한다. 지금 한국경제는 자영업자 줄 폐업과 높은 청년실업, 극심해지는 빈부격차 등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는데다 미중 갈등으로 수출 환경마저 악화하고 있다. 여기에다 일본과 전면 무역 전쟁이 벌어진다면 한국경제가 타격을 입을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거기다 주변국과의 관계도 좋지 않다. 사드 보복 이전 박근혜 정부 때 8차례나 열렸던 한중 간의 정상회담은 문재인 정부 들어 단 한번 이뤄졌다. 러시아의 푸틴은 2년 전 블라디보스톡으로 달려가 북한 제재강화를 부탁한 문재인의 요구를 면전에서 거절했고 이번 오사카에서 열린 양국 정상회담장에 111분이나 늦게 나타났다.

변덕쟁이 트럼프는 툭하면 주한미군 지원금을 늘리라 하고 한국상품에 고율의 관세를 위협하고 있다. 북한은 남북 군사회담과 모든 문화 교류를 중단시킨 채 미국과 직접 대화를 고집하고 있다. 한마디로 일본과 전면전을 치를 상황이 아닌 것이다.

한국정부와 한국민은 냉정을 잃지 말고 감정보다 국익을 우선한 노무현 정신을 배우기 바란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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