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동구권 자유화와 홍콩사태

2019-07-08 (월)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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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다. 습기가 높다. 홍콩의 7월은 결코 쾌적한 계절이 아니다. 시위는 계속되고 긴장은 고조되고 있다. 앞으로의 상황은. 200만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전 세계는 흥분했다. 그러나 이내 시들해졌다. 무관심 속에 홍콩은 결국 거대한 중국 공산체제의 질곡에 갇히고 말 것인가.

전체 인구 700여만의 홍콩은 14억 인구의 중국본토에 비교하면 하나의 점에 불과한 존재다. 게다가 중국공산당의 압제와 감시체계는 단연 전 세계 톱 수준이다. 그러니….
다른 전망도 나오고 있다. 내일이라도 베이징은 무력을 동원해 사태를 진압할 수 있다. 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 홍콩의 자유화 항쟁은 ‘뭔가 올 더 큰 것’의 전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홍콩 자유화 항쟁은 20세기 후반부에 동구 공산권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태와 같은 흐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내셔널 인터레스트지의 지적이다.


우선 시위의 성격이 그렇다. 처음에는 ‘체제 내에서의 항의성 시위’였다. 그러던 것이 달라졌다. 전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도 미동도 않는 당국. 거기에 절망감을 느껴 목숨을 던지는 사람이 속출한다. 결국 공산체제에 정면도전하는 자유항쟁 양상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달라진 시위, 그것은 그들의 표정에서도 읽혀진다. 1989년 10월의 동독 라이프치히의 비폭력 시위와 닮았다고 할까. 동독 공산당은 ‘중국식 해결법(그 해 6월의 톈안먼 식 유혈진압)’을 도입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얼굴에서 두려움은 찾을 수 없었다.” 이어지는 내셔널 인터레스트지 보도다.

공산당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촛불을 든 시위 군중은 계속 늘었다. 결국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이 세계사적 사건 전에 있었던 사태가 70년대 말의 폴란드 자유노조운동이다. 그보다 10년 전에는 프라하의 봄이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있었던 것이 헝가리 봉기다.

1956년 10월 23일, 헝가리 시민들은 공산당 지도부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다. 이 혁명은 소련의 무자비한 무력진압으로 두 주 만에 실패로 끝난다. 프라하의 봄도 소련군 침공으로 무산됐다.

당시 워싱턴의 정책입안자들은 헝가리 사태를 역사의 한 사소한 뒤틀림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면서 막강한 소련공산제국이 무너지고 자유세계가 도래한다는 것은 팬터지랜드의 이야기 정도로 치부했던 것.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사태들은 ‘나 홀로’의 일과성 사태들이 아니었다. 인간에 내재된 자유에의 욕망이 집단적으로 표출된다. 그러면 폭정체제는 그 흐름을 바로 짓누른다. 그렇다고 그 염원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살아나 또 다시 표출된다.
여기서 제기되는 것이 일종의 ‘도미노이론’이다. 헝가리사태가 있었기에, 프라하의 봄이 있었다. 프라하의 봄은 폴란드의 자유노조 운동을 가능케 했고 라이프치히 촛불시위로 이어져 베를린 장벽붕괴를, 그리고 소련제국 와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1989년 6월의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100만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자유화 시위에 돌입한 것. 이 상황은 어떻게 가능하게 됐을까. 그보다 앞서 타이완의 민주화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유화 시위는 결국 유혈참극으로 막을 내린다. 인민해방군이 투입된 것. 이후 공산당국은 톈안먼 사태의 기억을 지우려고 혈안이 돼 왔다. 그러면 중국인들의 자유에의 염원은 영원히 소멸되고 말았을까. 중국본토에서 전해져오는 소식들은 정반대의 정황을 보여준다.

해마다 수 만 건의 시위가 발생한다. 대부분이 ‘체제 내에서의 항의성 시위’다. 그러나 시위성격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때문에 베이징 당국이 필사적으로 구축하고 있는 것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감시체계다. 그 와중에 기독교, 인권운동가, 소수민족에 대한 박해는 날로 가중되고 있다.

다른 말이 아니다. 톈안먼사태는 ‘거대한 도미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30년 전 톈안먼 시위와 홍콩 자유화 항쟁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지적이다.

홍콩 시위 사태와 함께 새삼 드러난 또 다른 사실은 베이징이 보장해온 ‘일국양제(一國兩制)’ 약속의 허구성이다. 1984년 ‘하나의 중국’원칙과 함께 본래 타이완을 겨냥해 덩샤오핑이 내건 안으로 1997년 홍콩반환 이후 50년간 그 시행을 보장해왔다.

이 일국양제를 시진핑 체제가 무너뜨렸다. 그 상황에서 야기된 게 바로 홍콩사태다. 그 결과 타이완도 흔들린다. 때문에 사태의 파장은 30년 전 톈안먼사태 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는 것이다.

홍콩이 흔들리면서 반(反)중, 반공산당 정서는 타이완으로, 티베트로, 신장성으로 계속 확산된다. 한(漢)족 중심지역의 공기도 심상치 않다. 경제난에, 총체적 부패에, 천문학적 소득 양극화로 민심은 폭발직전이다.

“비유하자면 중국 본토는 마른장작을 높이 쌓아 놓은 것 같다. 홍콩에서 발화된 불꽃이 날아들기라도 하면…” 한 중국 내 인권운동가의 말이다. 그만큼 베이징은 초조하다는 지적이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일국양제의 허구성’- 이게 그런데 어쩐지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의 궁극적인 정책이 뭐라고 하더라. ‘한국식 일국양제‘, 다시 말해 수령유일주의 북한과의 연방제라 하던가. 그런 말이 공공연히 들려와 하는 말이다.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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