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북한의 진심

2019-06-18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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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대화를 처음 제안한 곳은 베를린이다. 취임 두 달 만인 2017년 7월 베를린으로 날아가 ‘한반도 평화 구상’을 내놨다.

이에 대해 북한 노동신문은 “평화의 미명 하에 늘어놓은 전반 내용들에는 외세에 빌붙어 동족을 압살하려는 저의가 깔려 있으며 조선반도의 평화와 북남 관계개선에 도움은커녕 장애만을 덧쌓는 잠꼬대 같은 궤변들이 열거돼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이 신문은 “그 어떤 구상이 있다면 왜 하필 자기 땅이 아닌 남의 나라 땅에서, 자기 민족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 앞에서 밝혔는가”라며 “금수도 자기 둥지를 잊지 못한다는데 제 나라, 제 민족보다 타국과 이방인이 그렇게도 더 좋단 말인가”라고 늘어놓았다. 흡수통일이 이뤄진 독일에 대한 북한의 불편한 심기가 엿보인다.


그리고는 그 해 11월 북한은 “핵 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조선 중앙통신’은 “김정은 동지는 … ‘화성-15형’의 성공적 발사를 지켜보시면서 오늘 비로소 국가 핵 무력 완성의 력사적 대업, 로케트 강국의 위업이 실현되었다고 긍지높이 선포하시었다”고 전했다.

그러던 북한은 그 다음해 신년사에서 평창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관계개선 의지를 내비쳤다. 그 결과 이뤄진 것이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와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북한 노동신문은 2018년 3월 “우리의 핵 무력은 피로 얼룩진 미국의 극악한 핵 범죄 역사를 끝장내고 불구대천의 핵 악마를 행성에서 영영 쓸어버리기 위한 정의의 보검”이라며 “우리 군대와 인민은 정의의 핵을 더욱 억세게 틀어쥐고 조선반도와 지역의 평화를 굳건히 수호할 의지를 백배, 천배로 가다듬고 있다”고 밝혔다.

그 후 김정은은 북미 정상회담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5월 27일 판문점에서 전격적인 2차 남북회담을 가졌고 싱가포르 회담은 성사됐다. 뒤이어 그 해 9월 문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 공동선언문을 내놓으며 남북관계는 획기적으로 개선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다음해 2월 김정은이 수십 시간 기차를 타고 간 하노이 북미회담이 결렬되면서 남북관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한국이 200억을 들어 보수공사와 운영비를 낸 개성의 연락사무소는 유명무실해졌고 이산가족 상봉과 문화교류, 군사회담 모두 중단 상태다.

김정은은 지난 4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문재인 정부의 중재자론에 대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한국이 “외세의존 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모든 것을 북남 관계개선에 복종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판문점 도보 다리와 백두산 천지를 거닐며 화기애애하던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그리고는 지난 14일 문 대통령이 스웨덴에서 북한의 완전한 핵 폐기를 촉구한 데 대해 북한의 대외 선전매체 ‘메아리’는 “력사의 교훈을 무시하면 오유(오류)를 반복하기 마련”이라며 지금 남조선의 ‘북핵 공조’를 추구하다 파멸 당한 박근혜 정권의 전철을 또 다시 밟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매체는 또 “한미동맹은 남조선 인민의 피땀을 합법적으로 공개적으로 짜내는 미국의 음흉한 약탈의 도구”라고 강변했다. 남북관계가 베를린 선언 이전으로 돌아갔음을 보여준다.


북한은 남북 관계개선을 위해 누구보다 힘쓴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이자 김정일 장례식장에서 김정은을 조문한 이희호 여사 장례식에 조문단을 보내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자기편을 들지 않는 한 더 이상 한국정부와 대화할 의사가 없음을 공표한 것이다.

그리고는 오는 20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북한을 공식 방문한다고 밝혔다. 중국 주석이 북한을 방문한 것은 2005년 후진타오가 마지막이다. 시진핑의 방북은 북중 수교 70주년을 기념하고 김정은이 네 차례나 중국을 찾은 데 대한 답방 형식이지만 북한으로서는 중국이라는 뒷배가 있음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중국으로서는 미국을 향해 북한 카드가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일 것이다.

남북문제가 풀리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북한에게 핵을 포기할 의사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직간접적으로 이를 여러 차례 표시해 왔다. 아직도 이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속히 깨어나길 바란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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