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멕시코와 대선

2019-06-11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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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후 집권한 미국 대통령 가운데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은 12명이다. 이 중에는 민주당도 있고, 공화당도 있고, 자기 힘으로 대통령이 된 후 재선된 사람도 있고, 전임자가 사망해 자리를 물려받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들 중 누구도 불경기가 한창인 때 출마해 재선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다.

재임 중이나 후 단임으로 끝난 대통령은 8명이다. 이들 중 세 명은 재임 중 암살되거나 병사했다. 나머지 5명 중 윌리엄 태프트는 테드 루즈벨트가 후계자로 지명해 대통령직을 물려받았지만 이후 사이가 틀어져 루즈벨트가 신당을 창당하는 바람에 공화당 표가 갈라져 재선에 실패했다.


태프트를 제외한 나머지 4명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 4명이 재선에 출마했을 때 미국은 심한 불경기를 겪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992년 빌 클린턴이 선거구호로 내걸었던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말이 사실임을 미국 역사는 보여준다.

1928년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된 허버트 후버는 고아로 자랐지만 광산업에 뛰어들어 백만장자가 된 대표적인 자수성가 형 인물이다. 제1차 대전이 터졌을 때는 유럽의 식량지원 책임자로 능력을 발휘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다. 그런 그도 대공황의 물결 앞에 속수무책으로 허둥대다 미국경제가 최악의 상황을 맞으며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이 기록은 앞으로도 당분간 깨지지 않을 전망이다.

아버지 부시는 걸프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지지율이 한때 90%까지 치솟았으나 불경기로 재선에 실패했고, 아들 부시는 부동산 버블로 인한 호경기에 힘입어 재선에는 성공했으나 임기 말 그것이 터지면서 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추락했다. 대공황을 연구한 벤 버냉키 당시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이 대공황 때와는 달리 돈을 푸는 바람에 대공황 같은 참사가 벌어지지는 않았으나 이 사태는 ‘대 불황’으로 불릴 만큼 전 세계인에 깊은 상처를 줬다.

그 다음으로 무능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지미 카터는 워터게이트라는 정치 추문에 환멸을 느낀 미국인들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대통령직에 올랐지만 정치 신인답게 아마추어적인 국정운영으로 실망만 안겨줬다. 이란에 억류된 인질을 구해 보겠다고 특공대를 파견했지만 때마침 불어 닥친 모래 폭풍으로 구조대만 죽는 비극이 벌어졌다. 그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만 억세게 재수 없는 대통령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정치생명을 끝낸 것은 좀처럼 내려가지 않은 실업률과 인플레였다.

역시 최하위권 대통령인 포드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1차오일 쇼크 이후 뛰는 물가와 대량실직을 해결하는데 실패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미국인들은 그게 대통령 탓이든 아니든 불경기 때 재선에 도전하는 정치인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일부터 멕시코 수입상품에 부과될 예정이던 관세가 무기한 연기됐다. 트럼프는 지난 주말 트위터를 통해 멕시코가 중남미 밀입국자를 막기 위해 국경수비대 보강 등 특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했다며 관세부과를 무기한 보류한다고 밝혔다. 이 관세는 점진적으로 25%까지 올라갈 예정이었다.

뉴욕타임스는 멕시코의 조치가 이미 전에 합의된 것이란 보도를 내놨는데 어쨌든 멕시코라면 좋은 얘기를 해본 적이 없는 트럼프가 이처럼 신속하게 멕시코의 노력을 인정하고 관세부과를 철회한 것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


이렇게 된 것은 멕시코와 무역분쟁을 일으켜 경기를 악화시키고 재선 전망을 어둡게 하기 보다는 하루속히 마무리 짓고 이를 정치적 승리로 포장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일 것이다.

대미 교역 5,570억 달러 규모의 멕시코는 중국, 캐나다에 이어 3번째로 큰 미국의 교역 상대국이다. 가뜩이나 고용과 투자가 둔화되고 있는 지금 멕시코와 전면적인 무역전쟁이 벌어진다면 내년 대선에 맞춰 불황이 찾아올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번 사태의 추이를 보면 이달 말 일본 오사카에서 있을 G20 회담에서도 미중 간 전면전보다는 타협이 이뤄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멕시코와의 무역전쟁을 피한 트럼프가 그보다 더 큰 타격이 불가피한 중국과의 싸움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도 재선을 원하기는 하는 모양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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