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웃기는 ‘섹스파업’쇼

2019-05-18 (토)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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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서울에서 여성만으로 이뤄진 ‘여:운김’ 극단이 ‘여자의 평화’라는 연극을 공연했다. 예수탄생 400여년전 고대 그리스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리시스트라타(Lysistrata)’가 원본이다. 모든 남자들이 아테네-스파르타 전쟁에만 열을 올리자 여걸 리시스트라타가 양국 여자들을 규합해 남자들에게 잠자리를 거부케 함으로써 평화를 회복한다는 코미디다.

그 연극이 서울에서 호평 속에 공연된 후 3개월이 지난 요즘 미국에 리시스트라타가 환생해 ‘섹스파업’을 주도하고 있다. TV 드라마 ‘누가 보스냐?(Who‘s The Boss)’에서 전업주부의 10대 딸로 출연했던 앨리사 밀라노(46)이다. 미투 운동에 앞장섰었고, 2013년엔 한국에서 보신탕이 될 개를 구조해 LA로 수송해온 동물보호 운동가이기도 하다.

밀라노의 섹스파업 목적은 전대미문의 초강경 낙태금지법인 ‘심장박동 법안(Heartbeat Bill)’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오하이오 주와 미시시피 주에 이어 지난주 조지아 주에서도 통과된 이 법안은 ‘프로-초이스(pro-choice, 낙태 지지)’ 그룹의 사활을 건 공격 목표다.


오하이오와 미시시피에서 오는 7월, 조지아에서 내년 1월 발효예정인 심장박동 법안은 말 그대로 태아의 심장박동이 처음 감지되는 시점(통상 임신 6주) 이후 낙태를 금지한다. 하지만 이때는 대다수 임신부가 실제로 임신여부를 모르고 지나는 시기다. 한국과 미국을 포함한 대다수 국가들은 낙태사유가 인정될 경우 임신 24주까지 인공임신중절을 허용하고 있다.

조지아 주 법안이 통과되기 훨씬 전에 할리웃 동료배우 50여명과 함께 ‘#SexStrike’ 캠페인을 시작한 밀라노는 “어렵사리 쟁취한 여성 생식권을 권좌에 앉은 남자들이 말소하려 든다. 이 법안을 밀어붙이는 ‘프로-라이프’(낙태 반대) 그룹의 궁극적 목표는 보수 쪽으로 기운 연방대법원이 1973년의 역사적 낙태 합헌판결을 뒤집게 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엊그제 앨라배마 주는 심장박동법보다 더 강력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임신부의 생명이 위급한 경우 외에는 낙태를 일체 금지하며 낙태시술 의사는 최고 99년형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강간 임신, 기형아 임신도 봐주지 않는 사실상 전면금지다.

내용이 강경할수록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주의회 다수당인 공화당의 속내다.

여성의 섹스 거부는 무려 2,400여년 전에 연극의 주제가 됐을 정도로 역사가 길다. 한국에서도 아내의 잠자리 거부가 이혼사유가 되는지를 놓고 공개토론이 벌어졌었다. 액션스타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15년전 캘리포니아 주지사(공화) 시절 조지 W. 부시 대통령 후보 지지연설을 했다가 부인인 마리아 슈라이버(민주)로부터 2주간 동침을 거부당했다고 털어놨었다.

여자들이 ‘신체 자주권’을 보장받을 때까지 남자들의 섹스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는 밀라노의 주장에는 호응만큼 비아냥도 많다. 내 생각에도 그녀의 섹스파업은 과녁이 틀렸다. 여성 파워가 기껏 남자에게 자기의 ‘몸’을 무기로 삼는 것 정도라면 진정한 페미니즘(여권주의)이라고 할 수 없다.

모든 여자들이 낙태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프로-라이프 쪽 여성들도 많다. 섹스는 지극히 개인적 사안이다. 남녀를 무조건 집단적 대결구도로 모는 것은 트럼프의 특기인 분리주의 정책만큼이나 위험하다.

‘여자의 평화’ 공연 극단인 ‘여:운김’은 ‘여럿이 함께 일할 때 우러나오는 힘’이라는 뜻의 순수 우리말 ‘운김’에 ‘여’를 붙인 것이란다. 밀라노가 쇼맨십이 아닌 운김 정신으로 차분하게 일을 추진했으면 좋겠다. 어차피 낙태금지법은 통과된 뒤 곧바로 소송이 걸려 효력이 정지된다. 호들갑 떨 필요가 없다.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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