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투’의 근원

2019-05-10 (금)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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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의 근원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당신도 한마디 해야 하지 않나?” “뭘요?” “뭐긴, ‘미투(Me Too)’ 말이야.”

어느 모임에서 나이든 지인이 뜬금없이 다그쳤다. 정신과의사가 된 업보였다. 지난 2년 각종 미디아를 통해 듣고, 보고, 읽어서 이제 식상할 때도 되었을 터인데 나보고 무슨 이야기를 더 하라니 당황스러웠다.

환자 중에 30대 말의 성도착증 환자가 있었다. 기혼의 회사원인 그는 독실한 여호와의 증인 부모 밑에서 외아들로 자랐다. 종교적으로 엄격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하며 부모와의 정겨운 대화는 없었다. 성에 대한 지식은 또래친구들과 숨어서 본 성인잡지가 전부였다.


어쩌다 TV에서 야한 장면이 뜨면 어머니가 그의 눈을 가리곤 했다. 그런 어머니가 집안에서 거의 반나체로 다녔다. 사춘기가 다가오자 그런 어머니를 보면 아랫도리에 자극이 오고 이를 들킬까봐 불안과 죄책감으로 안절부절 못했다.

고등학생 때 중요한 시험에 대비해 공부를 하다 머리도 식힐 겸 근처 공원에 나갔다. 그날따라 공원은 한산했고 젊은 여성 하나가 벤치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자신의 성기를 내보이고 싶은 욕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를 실행하자 놀란 여성이 허겁지겁 도망가는 모습에 강한 성적 흥분과 쾌감을 느꼈다.

집에 돌아와 후회하며 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하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후 무슨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거나 심한 스트레스가 생겼을 때면 한적한 장소를 골라 모르는 여성 앞에서 성기 노출하는 버릇이 들었다.

그러다가 회사일로 스트레스를 받아 노출을 했는데 회사 여직원이 우연히 보고 그의 아내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아내의 요청으로 그는 정신과의사를 찾았다.

환자는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했다. 그러나 노출을 어쩌다 한번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은 병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스트레스 해소 방식의 하나이며 상대 여성도 겉으로는 놀란 척 하지만 속으로는 재미있었을 거라는 단서도 붙였다. 그리고 한마디 더 했다.

“내 어머니는 집안에서만 벗고 있었지만 요즘 여성들은 직장에서까지 그런 차림이니 남자들만 걸리는 거죠. ‘미투’도 그래서 일어나는 게 아닐 까요?”

성적 쾌감, 흥분, 만족감이 사람이 아닌 어느 대상이나 사물을 통해 표현되는 성적장애를 성도착증이라 한다. 거의 남성이 대부분이고 사춘기에 발생하며 원인은 사회적, 심리적, 생물학적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동성애자보다 이성애자들이 훨씬 많다.


환자가 스스로 의사를 찾지 않고 도착증 때문에 법적 가정적 문제가 생겼을 때 도움을 청한다. 임상에서 보면 순수한 성도착증은 드물고 정신분열병, 인격장애, 물질남용 등 다른 정신질환과 함께 나타나는 게 보통이다.

성도착증에는 여성의 속옷 등에서 흥분을 느끼는 여성물건애(Fetischism), 타인의 성적활동을 엿보는 관음증(Voyeurism), 만원버스 등 혼잡한 장소에서 여성의 신체에 성적접촉을 시도하는 접촉도착증(Frotteurism) 그리고 아동성애증, 성적가학증, 성적피학증, 동물기호증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성기노출로 흥분을 느끼는 노출증(Exhibitionism)이 1/3 이상을 차지한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여성을 성 교환물이나 성 상품으로 여겨온 남성 우월적 사상, 프로이드 심리학에서 여아의 남근 선망, 남아의 거세불안에 근거를 둔 남근숭배이념, 여성을 현모양처와 창녀로 보는 이중적 태도, 남성의 자기애적 노출과 여성혐오 경향, 더 나아가 여자는 남자의 신체 일부로 만들어졌다는 종교적 믿음 등이 인간의 집단무의식 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 성 염색체, 유전자, 성호르몬을 포함한 생물학적 구조, 성별 사회적 역할이 인간본능인 성적 욕망의 패러다임을 주도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종교적, 유전적, 생물학적 견지에서 보면 고대로부터 남성중심문화가 사회를 이끌어 왔고, 세상 모든 남성은 잠재적 미투 가해자가 될 소질을 가지고 있다.

미투 가해자에 대해 책망과 선망의 이중적 잣대가 무의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회적 인식을 고치지 않는 한 ‘미투’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특히 자기조절이 어려운 충동장애와 성학대증 소유자들이 수컷의 공격적 성욕과 지배욕의 남용으로 미투 가해자가 되기 쉽다.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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