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법 방해 미수 사건

2019-04-23 (화) 12:00:00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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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공개된 특별검사 보고서 중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특별검사 임명 소식을 듣고 트럼프가 보인 반응이다. 트럼프는 2017년 5월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제프 세션스로부터 로버트 멀러가 특별검사로 임명됐다는 이야기를 듣자 “오 나의 하나님, 이건 끔찍한 뉴스다. 이건 내 대통령직이 끝났다는 거다. 나는 망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모두가 나에게 특별검사가 임명되면 대통령은 망가진다고 한다. 시간도 몇 년이 걸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이건 나에게 생긴 최악의 일이다”라고 한탄했다 한다. 트럼프의 절박하고 진솔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특별검사 보고서가 나온 후 자신이 “완전히 면죄부를 받았다”고 주장하던 트럼프가 며칠 만에 입장을 돌변, 이것이 “18명의 분노한 민주당 트럼프 증오자에 의해 쓰여진” ”조작되고 허위에 가득 찬” “미친 보고서”라고 주장했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무죄를 완전히 입증한 보고서가 조작되고 허위에 가득 찬 것이라면 트럼프는 죄가 있다는 결론이 내려져야 할 것 같은데 트럼프 식 계산은 이와 다른 것 같다.


이 보고서는 트럼프 캠페인 측과 러시아 정부요원이 여러 차례 접촉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구체적인 공모 증거는 찾아내지 못했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 기간 공공연하게 러시아 정부에게 힐러리 이메일을 해킹할 것을 촉구했으며 러시아 정부의 앞잡이 노릇을 한 위키리크스에서 흘린 정보를 캠페인에 이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공모는 아닐지 몰라도 공조가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특별검사는 폴 매너포트 트럼프 선거캠페인 매니저, 마이클 플린 국가안보 담당 보좌관, 마이클 코언 트럼프 개인변호사 등 트럼프 주변 인물 34명을 기소하고 이 중 7명의 유죄 평결 및 유죄 시인을 받아냈다. 트럼프 근처에 수많은 범법자들이 있었다는 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보다 심각한 것은 이 보고서가 밝혀낸 11건의 사법방해 시도 혐의다. 트럼프는 코미 전 FBI 국장에게 플린 관련 수사를 접을 것을 부탁했으나 그가 이를 거부하자 해임했으며 맥건 백악관 법률고문에게 멀러 특별검사를 해임할 것을 지시했으나 그가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션스 법무장관에게 러시아 수사 지휘권 포기를 번복하라고 지시했으나 세션스가 이를 거부해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결국 그를 해임했다.

이 중 가장 심각한 것은 특별검사 해임 시도다. 대통령에게 임면권이 있는 FBI 국장과 법무장관은 업무 수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임 사유를 둘러댈 수 있지만 대통령의 비리 수사를 위해 임명된 특별검사 해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법 방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리처드 닉슨도 특별검사를 멋대로 해임했다 그 역풍을 견디지 못하고 1974년 사임했다. 맥건이 트럼프 지시대로 특별검사를 해임했더라면 그것이야말로 명백한 사법 방해 행위가 됐을 것이다.

특별검사 보고서는 트럼프를 기소하지도 않았지만 그에게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님”을 명백히 밝히고 그 판단 여부를 의회에 떠넘겼다. 그냥 기소하지 않는 것으로 마무리 지을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님”을 명시한 것은 트럼프가 면죄부를 받았다고 주장할 여지를 봉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 보고서에 나온 내용만으로도 트럼프를 사법 방해로 기소할 수 있다고 보고 있으나 현직 대통령은 반역 등의 죄가 아닌 다음에는 기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이럴 경우에 대비해 있는 제도가 탄핵이지만 이 또한 지금 시점에서 추진하는 것이 적절한 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민주당이 다수인 하원이 이를 통과시킨다 해도 공화당이 다수인 상원에서 탄핵 유죄 평결에 필요한 2/3의 지지를 얻는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차기 대선을 1년 반 남겨 놓은 지금 유권자들의 심판을 통해 트럼프의 대통령직 유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란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어쨌든 사법 방해를 지시한 트럼프가 부하의 거부로 이를 피해가게 됐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기록될 것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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