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민자가 봉인가?

2019-04-20 (토)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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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유대나라에 르호보암이라는 왕이 있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의 아들이다. 그는 노인들의 충정어린 조언 대신 또래 친구들의 막말을 듣고 폭정을 일삼다가 나라를 남북으로 두 토막 냈다. 교만한 그에게 등을 돌린 10개 지파가 따로 나라를 세워 독립했고 두 지파뿐인 유대는 다윗-솔로몬 시절의 강국에서 약소국으로 전락해 계속 외침에 시달려야 했다.

성경에 나오는 유대나라 고사가 요즘 언론의 만류와 경고에도 아랑곳 않고 이민자, 특히 불법이민자들과 난민들을 막겠다며 또 초강경 카드를 내흔들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연상케 한다. 통치자가 고집불통, 안하무인격으로 여론을 무시하면 결국 국민이 분열되고 국력이 쇠약해진다는 것은 거의 3,000년 전에 르호보암이 보여준 역사적 교훈이다.

트럼프는 최근 이민정책을 총괄하는 국토안보부(DHS)를 속된 말로 작살냈다. 일을 화끈하게 못 한다며 커스텐 닐슨 장관을 쫓아냈다. 클레어 그레이디 차관도 등을 떠밀려 사임했다. 이들에 앞서 이민세관국(ICE) 차기국장으로 낙점된 론 비티엘로의 지명이 철회됐고, 비밀경호국(SS)의 랜돌프 엘리스 국장도 해임됐다. 다른 고위직 2명도 바늘방석이다.


DHS의 숙청바람을 주도하는 사람이 스티븐 밀러 백악관 선임고문이다. 트럼프의 최측근이자 반이민 강경정책의 입안자다. 지난해 멕시코국경을 넘어온 중남미 난민 자녀 2,700여명을 부모와 격리 수용해 비인도적 처사라는 비난을 받았던 ‘양자택일 정책’(자녀와 함께 교도소 수용 또는 자녀들의 무기한 보호소 격리)도 밀러 고문의 발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는 밀러를 닐슨 장관 후임으로 임명할 것이냐는 기자들 질문에 그를 늘어지게 칭찬하고는 “이민정책 책임자는 단 한 사람이오. 누군 줄 아시오? 바로 나요”라고 말했다. 그는 닐슨 후임으로 또 다른 매파인 세관국경보호국(CBP)의 케빈 맥앨리넌 국장을 임명했지만 이민전문가들은 난민자녀 격리 같은 밀러 고문의 강경정책이 부활할 것으로 우려한다.

실제로 사석에서 그렇게 운을 띄운 트럼프는 공식석상에서는 그럴 뜻이 없다며 부인했다. 그러면서도 “자녀격리 조치 덕분에 난민유입이 줄었다. 그 정책을 철회한 후 난민들이 소풍 가듯, 디즈니랜드에 구경 가듯 여유자적 국경을 넘어온다”고 주장했다.
최근에는 텍사스주 국경에서 “미국은 이미 만원이다. 난민이 더 이상 들어올 자리가 없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LA타임스 등 주요 언론들은 트럼프의 상황파악이 비즈니스맨답지 않다고 꼬집었다. 미국이 만원이기는커녕 이민자들을 서둘러 받아들여 빈자리를 메워야할 만큼 노동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이미 2006년, 당시 벤 버냉키 연준의장은 미국이 이민자를 연간 350만명 정도 받아들여야만 은퇴하는 베이비붐 세대의 일자리를 메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여성의 평균출산율은 1.77명으로 현상유지선인 2.1명에 훨씬 못 미친다. 현재 거의 완전고용 상태지만 노동력 성장률은 1970년대 연간 5%에서 2000년 이후 1% 미만으로 줄었다. 베이비부머 7,600여만 명이 은퇴하면서 세수입은 줄고 소셜 시큐리티와 메디케어 지출은 크게 늘어났다. 이런 문제들을 이민문호 확장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초강경 반 이민정책과 상관없이 멕시코 국경을 넘으려는 이민자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지난달에만 10만3,000여명이 체포돼 되돌려 보내졌다. 트럼프 말처럼 자녀격리 정책이 철회됐기 때문보다는 중남미 각국의 경제 및 치안상황이 더 악화됐고, 국경장벽이 세워지기 전에 입국하려는 군중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으로 전문가들은 풀이한다.

트럼프가 DHS를 박살내면서까지 반 이민카드를 내흔드는 이유는 자명하다. 2016년 선거에서 자기에게 승리를 안겨준 전략을 코앞에 닥친 내년 선거에 재활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대국의 대통령으로는 좀 쩨쩨해 보인다. 자기 지지층에만 영합하다가는 르호보암처럼 국민 분열의 재앙을 초래하기 십상이다. 이민자를 배척하기보다 활용하는 혜안이 아쉽다.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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