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얼굴’

2019-04-18 (목) 이바라기 노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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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김소문 ‘모성’

전차 안에서 여우와 똑 닮은 여자를 만났다
누가 뭐래도 여우다
어느 거리의 골목에서 뱀의 눈을 한 소년을 만났다
물고기라고 생각될 만큼 하관이 튀어나온 남자도 있고
티티새 눈을 한 할머니도 있고
원숭이를 닮은 사람은 널려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은
멀고 먼 여로(旅路)
정신이 아찔해질 듯 아득한 도정(道程)
그 끝자락에 피어난 한순간의 꽃이다

“당신 얼굴은 조선계야, 조상이 조선인이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눈을 감으면 본 적 없는 조선의
맑게 갠 가을 하늘
그 투명한 푸르름이 펼쳐지고
“아마도 그렇겠지요.”라고 나는 대답한다
뚫어져라 쳐다보고
“당신 선조는 파미르 고원에서 온 거야”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눈을 감으면
가본 적도 없는 파미르 고원의 목초 향기
피어오르고
“아마도 그렇겠죠.”하고 나는 대답했다

이바라기 노리코‘얼굴’ (성혜경 역)

이바라기 노리코는 일본 국정 교과서에 실린 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통해 윤동주 시인을 알리고 그 사인을 밝히기를 요구한 일본 여류시인이다. 그녀는 윤동주가 일본 검찰의 손에 살해당했으며 이런 배경을 알지 못하면 이 시인에게 다가갈 수 없다고 서술한다. 동주의 사진을 보고 그의 모습에 반해 그의 시를 탐미하기 시작했다는 그녀의 눈빛은 동주의 눈빛처럼 깊고 아름답다. 자신의 생에 새겨진 조선의 영혼 그리고 몽골과 파미르 고원의 기억을 더듬는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는 한국인의 가슴에 언제나 윤동주와 함께 살아있을 것이다. 한 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동주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슬픔 많은 4월의 아침이다. 임혜신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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