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도자기 이야기

2019-04-09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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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타는 일본 규슈 북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규모는 작을지 몰라도 이곳이 한일 양국사에서 갖는 의미는 작지 않다. 이곳은 일본 도자기 문화의 본고장이고 그 중심에 도산신사가 있다. 이 신사는 임진왜란 때 끌려온 도공 이삼평을 기리는 사원이다.

공주 출신으로 알려진 이삼평은 정유재란 때 사가현의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끌려와 도자기 생산 책임자로 임명되며 그가 가마를 연지 300년이 되는 1917년 이곳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진다. 이 기념비문에는 “이삼평은 우리 아리타의 도조임은 물론, 일본 요업계의 큰 은인이다. 현재 도자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은혜를 입고 있어 그 위업을 기리어 여기에 모신다”라고 적혀 있다.

일본인들의 이삼평에 대한 존경심은 일제 강점기인 1913년 그의 일본 이름 가나가와 산페이를 이삼평으로 바로 잡은 데서도 알 수 있다. 아리타산 도자기를 뜻하는 ‘아리타야끼’는 일본은 물론 서양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1650년대 첫 수출된 이래 70년 동안 700만 점이 넘게 팔려나갔다고 한다.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규슈 남쪽 사쓰마에는 그곳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남원에서 끌려온 박평의 등 80여명의 도공이 정착했다. 이들이 만든 ‘사쓰마야끼’라는 도자기도 ‘일본 최고의 백자’라는 명성을 얻으며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1597년 일어난 정유재란은 일본에서 ‘도자기 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많은 조선의 도공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 후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조선 정부는 강제로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들의 송환을 위해 ‘회답 및 쇄환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끌려온 도공들은 대부분 본국 귀환을 거부했다. 조선에서 천민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은 반면 일본에서 이들은 번주의 절대적인 지원 속에 사무라이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조선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만든 도자기는 훗날 다시 일본을 일으켜 세우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1854년 페리 제독에 굴복해 일본이 문호를 개방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근대화를 가장 먼저 수용한 곳은 규슈 지역이었다. 지리적으로 서양 문물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지만 근대화에 필요한 자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가의 번주 나베시마 나오마사는 도자기를 주력 수출산업으로 육성하면서 여기서 나온 돈을 근대 제철기술 개발에 사용했다. 사쓰마의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 역시 ‘집성관’을 세워 제철과 대포 제작에 성공했으며 군함까지 만들었다. 이 때 재원 마련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정유재란 때 끌려온 도공의 후예 심수관이 주임을 맡은 백자 공장이다.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통일한 후 쇄국 정책을 폈지만 나가사키 인근에 데지마라는 인공섬을 만들고 1641년부터 1859년까지 네덜란드와의 교역과 문물교류를 허용했다. 서양을 향해 창 하나는 열어 둔 셈이다.

반면 조선은 임진왜란 이전은 물론 그 후에도 도공들과 그들이 만든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이들은 천대했을 뿐 아니라 1653년 네덜란드인 하멜이 표류해 조선에 상륙했을 때도 넓은 세상에 대해 알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일본이 서양의 무력에 굴복해 문을 열고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을 미국과 유럽에 보내 선진 문물을 배울 때 조선은 같은 해 신미양요라는 승리 아닌 승리에 취해 쇄국정책을 내걸고 굳게 문을 닫았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조선이 도공들을 일본처럼 우대해 그 가치를 알아보고 도자기를 서방에 수출할 수 있었다면, 하멜을 포로가 아닌 서양문물 수입의 창구로 활용했더라면, 신미양요를 서양의 실체를 바로 아는 계기로 삼았다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일도, 지금처럼 남북으로 갈려 으르렁대는 일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지금 한일관계는 사상 최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은 한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상대 나라에 대한 반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이 이를 부추기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하기 쉬운 것이 남 탓하기다. 일본이 저지른 범죄는 마땅히 규탄해야 하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잘못은 없는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반성하지 않으면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개인이나 국가나 마찬가지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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