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일본 새연호‘레이와’에 관하여

2019-04-06 (토) 민병임 뉴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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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5월1일 나루히토 왕세자가 일왕(일본에선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새 연호(年號)로 ‘레이와(令和)’를 사용한다고 한다. 그 뜻이 ‘일본인들이 내일을 향한 희망의 큰 꽃을 피우자’는 것이다.

연호를 민족의 정체성이자 독립국가의 증거로 생각하는 일본 국민들은 요즘 축제분위기다. 동일본 대지진을 비롯 대형 사건사고가 많았던 헤이세이(平成)시대의 불황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담겨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의 새 연호 ‘레이와’가 한국민에게 어떻게 다가올 지, 잠시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일본의 근대화를 가져온 메이지 시대(明治:1867년~1912)부터 다이쇼 시대(大正:1912~1926), 쇼와 시대(昭和:1926~1989)까지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고통과 핍박의 시대를 거쳤다.


먼저 일본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19세기 중기이후 구미 열강이 일본으로 진출하여 개국을 요구했고 에도 시대가 막 내린 후 메이지 유신을 맞게 되었다. 1868년 메이지 천황은 지진, 화재, 전란 등 다양한 이유로 쉽게 연호가 바뀌던 것을 한 대에 한 연호만 쓸 수 있도록 했고 중앙집권제를 강화했다.

1889년 메이지 헌법을 반포, 근대기 일본은 입헌국가로 도약했으며 1890년에 의회 개설에 의해 천황제의 지배체제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경제적으로 큰 발전을 한 일본에 의해 조선의 수난이 본격 시작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타이완을 점령했고 1896년 명성황후를 시해했으며 러일전쟁 승리 후에는 제국주의 정책이 더욱 노골화되었다. 결국 1910년 메이지 43년에 조선은 일본에 강제병합되었다.

1912년 다이쇼 천황이 지배하는 다이쇼 시대에는 세계1차 대전 중 강국이 된 일본은 조선의 경제권을 수탈했다. 1919년 3.1운동 후 독립 운동가들은 만주로 망명을 해야했고 1926년 등극한 쇼와 천황은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1931년 9월 만주사변, 1936년 독일과 군사동맹, 1937년 중일전쟁, 그 해 12월에는 중화민국 수도 난징 학살사건을 일으켰다. 1940년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군사동맹을 맺었고 1941년 12월8일 하와이 진주만을 급습하여 태평양 전쟁을 시작했다.

이때 조선인은 징병에 징용, 일본군 위안부까지 강제로 끌려가 전쟁에 이용되었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8월15일 쇼와 천황은 가늘고 떨리는 목소리로 항복 선언을 하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

개인적으로 ‘쇼와’라는 일본의 연호를 잊을 수 없는 것이 오래전 돌아가신 엄마의 유품인 일기장 앞장에 쓰인 ‘昭和 16年, ‘昭和 17年’을 본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모든 조선인들도 관공서 공문서부터 은행통장, 부동산계약, 통신표, 일기장 등 각종 문서에 일본의 연호를 사용해야 했다.

일본어와 한국어로 쓰인 엄마의 일기장은 만지면 바스라질 듯 누렇게 변하고 낡았는데 전쟁 말기의 참상이 일부 담겨있었다.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면서 기숙사의 학생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자 여학생들이 강당에 모여서 우리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붙들고 울던 일, 물자가 없어서 우유 한 곽 사기도 힘들던 일 등이 쓰여 있었다. 왜 우리 엄마가 꽃다운 청춘을 나라 잃은 슬픔과 울분, 전쟁의 공포로 보내야 했나 답답했었다. 소화 16년, 17년은 일본이 전쟁의 광기에 휩싸였던 1941년과 1942년이었다.

히로히토 천황은 1989년 87세로 사망하여 쇼와 시대 63년 치세를 끝낼 때까지 수많은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의 죽음에 책임지지도 않았고 전쟁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인 사과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일본은 이번에 나루히토의 레이와 시대를 맞아 새로운 도약과 발전을 기대한다는데 바로 이 일본의 부흥기가 문제이다. 그때는 언제나 이웃나라를 넘봤다는 역사적 사실을 잊지 말자. 이 레이아의 화(和)가 세계 평화로 갈 지, 일본 중심의 안정과 조화로 갈 지 잘 지켜보아야 한다.

<민병임 뉴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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