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재정 포퓰리즘 견제장치 없으면 미래세대 ‘세금 독박’

2019-03-22 (금) 권구찬 기자
작게 크게

▶ 과거엔 걷힐 돈 맞춰 지출했지만 MB·박 정부 거치며 씀씀이 커져

▶ 문 정부도 ‘일단 쓰고보자식’ 운용, 정치논리에 11년 연속 재정적자
저출산 등 감안땐 미래 더 암울… 향후 국가부채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쓰나미가 전 세계를 강타하자 이명박(MB) 정부는 이듬해 봄 28조원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했다. 추경 역사상 최대치로 그해 예산의 10%쯤 된다. 재정의 힘은 강했다. 2008년 0.7%로 곤두박질쳤던 경제성장률은 이듬해 6.5%로 솟구쳤다. 그즈음 그리스 등 유럽 남부의 재정 취약 국가들이 줄줄이 재정위기로 수렁에 빠진 상황과는 천양지차였다. 1997년 외환위기 때도 재정의 경기 복원력은 빛을 발했다. 우리나라가 두 차례의 경제위기를 조기에 극복한 배경에는 든든한 재정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걷힐 돈에 맞춰 씀씀이를 결정한 양입제출(量入制出) 원칙에 충실한 덕분이다.

나라 곳간지기들의 금과옥조였던 건전재정 기조가 흔들리고 있다. 흔히 ‘큰 정부’를 지향하는 진보 정부일수록 팽창적 재정운용을 한다고 하지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관리재정수지가 공개된 1990년 이후 흑자를 기록한 시기는 딱 3차례(2002·2003·2007년)인데 죄다 진보정부 때였다. 재정적자는 역대 정권을 거치면서 갈수록 커지는 양상이다. MB 정부 5년 동안 99조원의 적자를 기록하더니 박근혜 정부 5년간(2017년 포함) 130조원의 적자를 냈다. 다음달 초에 나오는 국가결산을 봐야겠지만 지난해 역시 재정적자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게 되면 2008년부터 11년 연속 적자다.

나라 살림 적자의 심각성은 올해부터 본격화한다. 정부의 장기재정 전망(2018~2022년)을 보면 건전재정 기조는 버려진 헌신짝 신세다.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을 듯 일단 재정부터 쓰고 보자는 게 재정운용 기조다. 올해 33조원인 재정적자 규모는 오는 2022년 63조원으로 두 배 늘어난다. 올해부터 2022년까지 4년 동안 누적 재정적자는 자그마치 195조원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정부는 낡은 레코드를 틀 듯 재정여력이 충분하다는 말만 반복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국제 비교 기준이 되는 국가부채인 일반정부 부채(D2 기준) 비율은 2017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42.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치인 110%를 크게 밑돈다. 하지만 넓은 의미의 기준을 적용하면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공기업 부채를 합친 공공부채(D3) 비율은 60.4%로 유럽의 재정준칙인 60%를 웃돈다. 이뿐만이 아니다. 국가부채보다 더 많은 845조원의 연금충당금 부채 폭탄도 도사리고 있다.


저출산·고령화 추세를 고려하면 장기재정 전망은 더 암울하다. 더구나 저성장까지 겹쳤다. 올해 초 국회예산정책처가 펴낸 장기재정 전망(2019~2050년)을 보면 공식적인 국가부채(D1) 비율은 2040년 65.5%로 유럽 재정준칙을 뛰어넘고 2050년에는 85.6%로 치솟는다. 10년마다 부채 규모는 50%씩 늘어나고 당장 내년부터 사회 보장성 연금을 합친 통합재정수지마저 적자로 돌아선다. 통합재정수지 적자는 2009년 이후 처음이다. 이는 국민이 부담하는 사회보험료 인상의 예고나 다름없다.

나라 곳간 문제의 심각성은 미래의 지출 수요에 대비한 현 단계의 정책적 대응과 고민이 없다는 데 있다. 가뜩이나 정치권의 무책임한 포퓰리즘은 선거 때마다 기승을 부리는 마당이다. 정권을 잡으면 재정은 공약 이행의 손쉬운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외환위기 이후 분리됐던 기획예산처가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로 흡수되면서 재정운용과 거시경제정책 사이의 견제 기능도 약화됐다. 전문가들은 재정의 정치화가 심해질수록 재정 특유의 ‘적자 편향성’을 바로잡기 힘들어진다고 강조하고 있다.

관건은 역시 재정규율의 확립이다. 기획재정부 차관과 국무조정실장을 거친 추경호 자유한국당 기재위 간사는 국회 내 대표적인 재정규율론자로 통한다. 그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친정인 기재부의 재정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던데. “정 필요하면 재정카드를 동원해야 하지만 도가 지나치다. 기·승·전·세금 쓰기 아닌가. 정부는 생색을 내지만 그 부담은 미래 세대에 전가되지 않나.”

-과거 정부에서도 줄곧 재정적자를 봤는데. “그래도 보수정권에서는 건전재정 기조를 주요한 정책가치로 여겼다. 예산 증가율을 경상 성장률 이내로 묶거나 아예 수입 증가율 이내로 제한하기도 했다. 지금처럼 일단 쓰고 보자는 식은 먹튀나 다름없다.”

-나라 살림을 어떻게 꾸려야 하나. “앞으로 지출수요 증가가 분명한데 돈 들어올 곳은 줄어들고 있다. 이대로 가면 재정파탄이 나지 않는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증세는 국민적 저항이 만만찮다. 팽창적 재정정책이 경기를 진작시켜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린다면 동의할 수 있다. 그래야 세수 기반도 늘어난다. 더 늦기 전에 재정준칙을 세워 씀씀이를 통제해야 한다.”

저성장 뉴 노멀과 고령화·저출산 쇼크는 앞으로 재정운용을 제약하는 상수가 될 것임은 불문가지다. 현세대의 재정악화는 미래 세대에게 폭탄 떠넘기기나 다름없다. 이정희 서울시립대 교수는 “현세대의 지나친 이익추구 행위를 견제해야 한다”며 “세대 간 공평성을 확보하도록 다양한 유형의 재정준칙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권구찬 기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