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현금 없는 사회’ 40년…‘존재 이유’ 옅어진 카드사

2019-03-21 (목) 김기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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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핀테크 성장 속 혁신 기회 놓치고 점유율 싸움에 마케팅 비용 늘어나

▶ 당국에 수수료 인하 빌미만 제공…카드업체 신용등급 강등 경고까지 ‘우리에 필요한 산업인가’의문 직면

‘현금 없는 사회’ 40년…‘존재 이유’ 옅어진 카드사

스마트폰 모바일 페이먼트의 등장 등으로 크레딧 카드의 존재감은 갈수록 작아지고 있다. [AP]

“만만한 게 동네북 아니냐.” 지난해 정부가 가맹점 수수료 인하를 강행할 때 국내 카드사 최고경영자(CEO)는 억울한 듯 이같이 말했다. 3년마다 적격비용을 산출해 수수료를 인상할지, 인하할지를 정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매년 정부가 관여해 수수료를 떨어뜨려 왔다는 것이다. 지역 자영업자는 총선이나 대선 때 표가 돼 애꿎은 카드사 팔만 비틀어 인기를 얻으려 하다 보니 일종의 ‘희생양’이 됐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간편결제(페이) 등 핀테크가 무서운 기세로 크고 있고 정부의 정책도 카드사만 보조하는 규제 울타리를 걷어내고 있어 갈림길에 서게 됐다.

규제 울타리에 기대 과거처럼 현실에 안주만 하고 혁신을 등한시하면 고사위기에 직면할 수 있고, 새로운 혁신경쟁을 벌이고 글로벌 시장으로 파이를 키우면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현금 없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했고 세수증대·내수부양이라는 국가 정책에 일조했던 과거의 ‘영광’을 이어가느냐, 아니면 계륵과 같은 존재로 전락하느냐는 카드사의 혁신에 달렸다는 지적이다.

15일 금융권에 따르면 국내 8개 신용카드 이용액은 하루 2조원에 달한다. 연간 700조원. ‘수수료 0.1%’가 수천억원을 좌우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가맹점과 카드사들은 0/1%의 수수료 전쟁에 목숨을 걸고 있다. 문제는 지난 40여년간 꾸준히 성장해 왔던 카드산업의 주변 환경이 녹록치 않다는 점이다. 이러다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마저 엄습하고 있다.


지난 1978년 국내에서는 외환은행 비자카드로 첫 신용카드가 출시된 이후 1987년 신용카드업법 제정으로 LG·삼성 등 대기업이 전업 카드사를 설립했다. 지난 1987년 악몽과 같았던 외환위기는 카드산업이 본격적인 성장을 하는 계기가 됐다. 김대중 정부에서 상거래 투명화 및 소비 활성화를 위해 카드 활성화 정책을 내놓은 것이다. 2000년부터 신용카드 이용액이 소득공제 대상에 포함되며 사용 규모가 급증했다. 부작용도 컸다. 2003년 이른바 ‘카드대란’으로 빚어졌다. 소득이 없는 학생까지도 무분별하게 카드가 발급된 결과 수많은 신용불량자가 양산됐다. 이런 전철을 밟으면서도 카드사들은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카드사들은 언제부턴가 정치권과 정부의 포퓰리즘 정책의 표적이 됐다. 카드사를 압박해 수수료를 깎도록 하는 ‘관치’가 일상이 됐다. 좁은 시장을 둘러싸고 출혈경쟁을 하다 보니 마케팅 비용만 증가하고, 결국에는 당국의 수수료 인하의 빌미만 제공하게 된 것이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카드사들이 무이자할부나 할인 등 각종 결제 혜택을 앞세워 점유율 경쟁을 하다 보니 카드 원가에 포함되는 마케팅 비용이 급증했다”며 “이 비용만 줄여도 수수료 인하 여력이 있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8개 전업 카드사의 총 마케팅 비용은 3조2,459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1.1% 늘었다.

그런데도 카드사들은 혁신은 커녕 좁은 국내 시장서 점유율 경쟁만 했다. 간편결제나 개인간금융(P2P) 등이 급성장하고 있는 데도 카드사들은 시장점유율 경쟁을 위해 과도한 고객혜택 등을 줘가며 출혈경쟁만 했다. 마케팅 비용이 올라가 공멸할 수 있는 ‘치킨게임’이 될 수 있는데도 점유율 하락 우려에 누구도 먼저 총성을 멈추지 않았다.

최근 들어서야 해외 진출에 나선다고 하지만 계열 은행을 따라가는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IT 발달로 글로벌 시장이 눈앞에 펼쳐지는 데도 공략할 준비를 하지 못한 것이다. 수수료 협상에 참여했던 대형가맹점 관계자는 “수수료 인상의 근거가 되는 카드사의 자금조달 금리나 부실률 등이 3년 전보다 훨씬 나아진 것으로 수치가 말해주는 데도 (카드사들은) 영세가맹점 수수료를 인하한 부분만큼 대형가맹점이 무조건 인상을 해줘야 한다고 주장만 하더라”라며 “다른 데서 뺨 맞고 대형 가맹점에 화풀이하는 식으로 비쳐졌다”고 말했다.

게다가 정부의 핀테크 집중 지원은 카드사의 설 자리를 점점 좁게 만들고 있다. 카드사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은행의 결제망까지 개방하도록 한 만큼 핀테크는 결제 시장을 잠식할 수 있는 날개를 달았다”면서 “카드사가 많은 비용이 투입해 구축한 결제 인프라는 점차 쓸모가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카드사의 위기감은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먼저 지적했다. 무디스는 금융 당국의 은행 결제망 개방 계획으로 핀테크 결제사업자가 성장해 신용카드사의 시장 점유율을 잠식할 것이라며 카드사의 신용등급 하락 가능성을 경고했다.

카드사들은 수수료 인하로 올해부터 3년간 전체 당기순이익이 1조5,000억원 줄 것이라며 앓는 소리를 하고 있지만, 혁신다운 혁신 프로그램을 내놓지 못하자 귀담아 듣는 곳이 없다.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구조조정 불안감만 얘기하지 핀테크와 어떻게 싸울지, 글로벌 시장을 어떻게 공략해 나갈지에 대한 청사진은 뚜렷하지 않다. 8개 카드사 직원은 1만3,000명 수준이다. 핀테크나 간편결제 업체의 직원이 수십명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면 경쟁력부터가 의문이다.
올해 카드사 CEO들은 점유율 경쟁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데 초점을 맞추겠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비용 절감만으로는 카드 업계의 앞날을 보장할 수는 없다. 수수료 협상 결과에 연연하기 보다 이 같은 악재를 뛰어넘을 한방을 준비해야 ‘플라스틱 카드’ 시대를 넘어 새로운 제2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김기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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