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국가 비상사태라는 허구

2019-03-19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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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한 후 처음 치러진 1963년 대통령 선거는 외신들도 “놀랄 정도로 공평하고 자유로웠다”고 평가할 정도로 평온한 분위기에서 열렸다. 이 때 박정희는 구태 정치인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46%대 45%로 윤보선에 신승을 거뒀다.

그 후 4년 뒤 열린 대선에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박정희의 야심찬 계획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둬 51%대 41%이라는 여유있는 표차로 재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이 때부터 박정희는 악수를 두기 시작한다. 자기가 만든 공화당 내 일부 인사들의 반발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3선 개헌을 밀어붙이더니 1971년 대선을 부정과 지역감정이 판치는 최악의 선거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고도 선거 결과는 53%대 45%로 4년 전보다 표차가 줄어들었다.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대한 많은 국민들의 반감에 장기집권 피로감까지 겹쳤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해 선거에서 박정희는 “여러분께 다시는 나를 찍어 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야당의 김대중 후보는 “박정희가 헌법을 고쳐 총통이 되려 한다”고 주장했다.


선거 결과를 본 박정희는 앞으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집권이 어렵다 판단하고 비상수단을 쓰기에 이른다. 그래서 나온 것이 1972년 10월의 국가 비상사태 선포다. 박정희는 대통령 특별 선언을 통해 국회를 해산한 후 정치활동을 중지시키고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는 헌법이 대통령에 부여한 권한을 넘는 것으로 제2의 쿠데타였다. 이렇게 전권을 장악한 그는 11월 사실상의 총통제를 채택한 유신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쳐 투표율 91.9%, 찬성 91.5%라는 공산당식 지지로 통과시킨다.

그가 비상사태의 이유로 든 것은 중공이 유엔에 가입하고 북한이 남침 준비에 열을 올린다는 것으로 자신의 종신집권을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박정희는 비상사태를 해결하겠다며 일체의 사회 불안을 용납하지 않고 언론의 무책임한 안보 논의를 금하며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무리수와 억지를 고집하던 박정희는 결국 부하의 총탄에 맞아 세상을 뜬다.

박정희가 죽은 지 어언 40년이 되어 가는데 그 뒤를 따라가려는 사람이 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다. 그는 지난 달 멕시코 국경지역에서 마약, 폭력, 인신매매 등이 벌어지고 있다며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 비상사태법’에 의거해 연방의회가 다른 용도로 배정한 예산을 전용해 국경장벽 건설에 쓰겠다고 밝혔다.

연방의회가 이를 금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켜 발목을 잡자 이번에는 취임 후 처음 거부권을 행사해 뒤집어 버렸다. 민주당이 다수당인 연방하원은 말할 것도 없고 공화당이 다수인 상원에서도 결의안이 통과된 것은 공화당 내에서 12명이나 반란표가 나왔기 때문이다. 국경에서의 마약과 폭력은 새로운 일이 아닌데 이를 핑계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예산을 전용한다면 이는 헌법이 정한 의회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며 훗날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 멋대로 하는 길을 터주는 것이라는 게 이들 주장이다.

트럼프가 국가안보를 이유로 권력을 남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작년 3월에는 외국 철강제품이 미국 안보를 위협한다며 25%의 관세를 일방적으로 부과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면 무역적자를 줄이고 일자리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그 후 1년이 지난 지금 캐나다와 멕시코가 보복관세를 부과하는 바람에 수출이 큰 폭으로 줄어 철강에서의 무역적자 폭은 10억 달러가 오히려 늘어났다. 전국 경제연구국 조사에 따르면 철강 관세 부과로 미국 GDP는 78억 달러 줄어들었다. 관세 부과로 혜택을 본 사람들은 관세 장벽 속에서 안주하고 있는 극소수 철강업자들 뿐이다.

트럼프의 국가 비상사태를 이용한 예산 전용이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민주당과 여러 주정부, 시민단체들이 그 위법성을 지적하며 소송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진짜 국가 비상사태는 국경의 마약밀매가 아니라 트럼프 같은 인물이 대통령이 돼 권력을 남용하고 있는 것이라 본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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