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후일담’

2019-03-19 (화) 정한용(1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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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김소문 ‘모성’

아프리카 어떤 부족은, 사람이 죽어도 그 영혼은 살아있다고 믿는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 머릿속에 함께 살아가다, 그들이 모두 죽으면 그때서야 진짜로 죽는다고 한다

지금 내 몸속에는 누가 살고 있나
그렇구나,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는 아직 살아계신 것이다
젊은 나이에 간 규선이도 있고, 장례식에 못 가본 은사님도 아직은 내 곁에 있다

고향마을 뒷동산에서 잡았던 참새도, 썰매 송곳을 만드느라 베어낸 노간주나무도 아직은 살아있다
베란다에서 말라비틀어진 참죽꽃도, 생사불명의 아버지도, 아프간에서 쓰러진 검은 눈망울의 아이도, 죽은 것이 아니다

이러다 내가 가면
그래, 그제야 모두 함께 떠나겠구나
나 혼자 가는 게 아니구나

내 몸에 깃든 모든 존재들이여, 그러니, 슬퍼할 것 없겠다
나는 죽어도, 나를 기억하는 이, 세상에 서넛 둘 하나 남아있을 때까지, 그 때까지는 죽은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생의 끈을 풀 때까지

정한용(1958- )‘후일담’ 전문

오래된 프랑스 영화가 생각난다. 멸망한 세상에 남은 단 몇 명의 생존자들이 인류 존속의 가능성을 기억에서 찾아내려하던 Si-Fi다. 문명과 더불어 인간의 기억까지 멸한 뒤, 한 조각 익명의 기억에 집요하게 매달리던 그들은 사랑하는 자를 잃고 그 기억을 찾아 울부짖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또 하나의 우리였다. 기억이라는 신비의 인연.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억과 함께 살고 있는가. 꽃과 새와 사랑했던 이들과 그들이 있던 장소와 향기와 뒷모습. 함께 하기에 떠나지 않았고 죽지도 않은 그들. 그들은 기억의 기억의 기억을 지나며 우리와 함께 살고 또 사라져 갈 뿐이다. 임혜신 <시인>

<정한용(1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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