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십자가가 설 자리는…

2019-03-09 (토)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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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할리웃 고갯마루를 101번 프리웨이를 따라 북쪽으로 넘어가다 보면 오른쪽 산에 우뚝 선 흰색 대형 십자가가 밤낮 없이 눈에 들어온다. 거의 한 세기 전(1922년)에 세워져 뒤쪽의 ‘HOLLYWOOD’ 사인판과 함께 LA 명물이 된 이 십자가를 하루 수십만명의 운전자들과 주민들이 바라보며 살지만 전혀 시비가 없다. 사유지에 세워진 사유재산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워싱턴DC 교외인 블레이든스버그(메릴랜드주)의 도로변 국유지에 할리웃 십자가보다 3년 뒤 세워진 주정부 소유의 ‘평화 십자가(Peace Cross)’는 바람 잘 날이 없다. 지난주 연방대법원은 기독교계와 정교분리주의자들의 첨예한 관심 속에 이 매머드 십자가의 철거여부를 놓고 소송 관계자들의 공방 주장을 들었다. 결론은 오는 6월 내려질 전망이다.

높이 40피트의 콘크리트 조형물인 이 십자가는 원래 제1차 세계대전 전몰장병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현판에는 이 지역 전사자 49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건립당시 허허벌판에 세워졌지만 지금은 간선도로의 중앙분리대 안에 갇혀 있다. 주변에 다른 전쟁 전사자 기념비와 9·11 테러 희생자 추모비까지 속속 들어서면서 재향군인 기념공원이 형성됐다.


이 소송은 2012년 일부 주민들과 미국 인본주의자협회가 제기했다. 주정부가 십자가를 소유하고 야간에 조명까지 밝히는 것은 수정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에 위배된다는 주장이었다. 주정부는 이 십자가가 전몰장병을 기리는 상징물일 뿐이며 조명장치는 교통안전을 위한 것이지 특정종교를 선전할 의도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1심법원은 주정부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제4 연방항소법원은 2017년 정반대 판결을 내렸다. 기독교의 엄연한 최고 상징물인 십자가를 주정부가 소유하고 관리하는 것은 수정헌법 규정을 지나치게 오버한 종교유착이라며 그 근거로 1971년의 역사적 대법원 판결인 ‘레몬 테스트’를 들었다. 지난주 연방대법원 공방에서도 대법관들과 양쪽 변호인들 사이에 레몬 테스트를 놓고 설전이 벌여졌다.

대법원은 48년전 ‘레몬 대 커츠만’ 소송에서 로드아일랜드 주정부가 기독교계열 학교 교사들의 봉급을 지원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시했다. 당시 워렌 버거 대법원장은 수정헌법 조항을 적용할 때 정부조치가 세속적인지, 특정 종교를 부추기는지, 정교유착이 조장되는지 따지도록 했다. 그 가이드라인이 ‘레몬 테스트’로 불리며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다.

지난주 연방법원 논쟁에서 주정부 변호사들은 평화 십자가가 전몰장병을 기리는 뚜렷한 취지를 갖고 있고 일반 십자가형 기념비들도 종교보다 세속적 상징물이 된지 오래라며 기존의 모든 십자가 기념비들이 레몬 테스트 없이 유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닐 고서치 대법관으로부터 레몬 테스트를 ‘개차반(dog‘s breakfast)’으로 여기느냐는 질책을 들었다.

유대계인 엘레나 케이건 대법관은 십자가가 어떻게 세속물이 될 수 있느냐고 다그치며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려고 거기에 매달려 죽었고 사흘 후 부활했다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를 대변한다”고 지적했다. 천주교 신자인 소니아 소토메이어 대법관은 십자가가 세속물이라는 말 자체가 심각한 신성모독이라고 꼬집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과 일부 보수계 대법관들은 원고 측 논리대로 평화 십자가를 허물면 국유지에 서 있는 다른 십자가 조형물도 모두 허물어야할 것이라며 남북전쟁 후 1888년 건립된 게티스버그 사적지의 십자가 기념비와 전국 국립묘지의 모든 십자가 묘비들은 물론 공원 등지에 세워진 인디언 원주민의 토템(장승)들도 철거대상이 될 수 있다고 공박했다.

평화의 십자가가 이름과 정반대로 싸움의 십자가가 됐다. 십자가뿐이 아니다. 크리스마스의 아기예수 탄생 모형(네이티비티)도 설자리를 잃어가는 세태다. 기독교계는 6월 대법원 판결이 평화 십자가에 유리하게 내려질 것으로 전망하지만, 두고 볼 일이다. 기존 십자가 모형 기념비들은 괜찮지만 추후 신규 십자가 기념비는 금지한다는 단서가 붙을지 모른다.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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