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뒤통수치기

2019-03-05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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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학’은 2005년부터 5년 동안 트럼프가 운영한 부동산 투자교실이다. 부동산으로 억만장자가 된 트럼프가 여기서 교육을 받으면 누구나 자기처럼 큰돈을 벌 수 있다며 학생들을 모아 부동산 투자기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 학교는 2010년 뉴욕 주로부터 대학 면허 없이 ‘대학’이란 이름을 쓰면 안 된다는 시정 명령을 받고 이름을 ‘트럼프 기업가 이니셔티브’로 바꿨다가 결국 문을 닫고 만다. 그 후 2013년 뉴욕 주 검찰은 이곳이 불법 영업과 허위 선전을 해왔다며 4,000만 달러 규모의 소송을 제기한다.

이와는 별도로 이 학교에 다닌 학생들은 트럼프가 계약 위반과 사기 등의 잘못을 저질렀다며 두 건의 손해배상 소송을 연방법원에 제기했다. 소장에 따르면 트럼프가 임명한 강사들은 학생들에게 허위 마케팅 기법과 강매 전략 등을 가르쳤으며 학생들을 상대로도 사기행각을 벌인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는 학생들의 98%가 좋은 평점을 줬다고 응답했으나 일부 학생들에 따르면 학교 측이 질의 응답서를 제대로 작성하지 않으면 졸업장을 주지 않겠다고 협박했던 사실도 있었다. 2016년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는 2,500만 달러의 배상금을 내고 소송을 종결하는데 합의했다.

이 학교가 운영되는 동안 총 7,000여명의 학생이 1,500달러에서 3만5,000달러를 내고 강의를 들은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로써 이들은 낸 돈을 거의 돌려받을 수 있게 됐다. 액수는 얼마 안 되지만 가난한 학생들을 상대로 이런 사기를 쳐 돈을 뜯었다는 것 자체가 트럼프의 인간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트럼프 말을 믿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것은 이들만이 아니다. 트럼프가 2018년 취임 후 첫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타락하고… 잔인한 독재 정권”이라고 부르고 북한에 관광 갔다 고문 끝에 사망한 오토 웜비어 부모와 팔다리를 잃은 채 북한을 탈출해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지성호를 연설장에 불러내 북한의 잔학상을 규탄했을 때만도 순진한 한국의 우파들은 트럼프가 김정은을 혼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불과 몇달 후 트럼프가 싱가포르에서 북한의 김정은을 만나기로 한 후에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김정은을 ‘강력한 지도자’로 추켜세우는가 하면 그가 “아름다운 편지를 보내왔다”느니 그와 “사랑에 빠졌다”느니 김정은 찬사 일색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국의 좌파가 그와 사랑에 빠졌다. 부동산 투기로 거금을 벌고 수많은 사람을 상대로 사기 행각을 저지른 플레이보이 트럼프는 사실은 좌파의 공분을 사 마땅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트럼프가 김정은을 감싸고돌자 “장사꾼 트럼프야 말로 미국과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본다”며 미국의 기존체제와 맞서가며 북핵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푼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한국 좌파가 무엇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있는지 본색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그런 좌파가 이번에 심하게 뒤통수를 맞았다. ‘스몰 딜’이든 ‘빅 딜’이든 뭔가가 성사될 것으로 믿었던 하노이의 미 북한 간 정상회담이 ‘노 딜’로 허망하게 끝난 것이다. 청와대는 회담 결렬 15분 전까지도 회담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국정부의 정보력 부재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준다.

자신과 돈독한 신뢰관계를 맺었다는 트럼프 말만 믿고 66시간이나 기차를 타고 머나먼 하노이까지 간 김정은도 이번에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포커페이스’로 유명한 그도 이번 회담 결렬 후에는 얼굴에서 피로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북한은 이번에 영변 하나를 내주고 무기판매를 제외한 거의 모든 제재를 풀려 했고 미국은 영변 외 비밀 우라늄 농축시설과 모든 핵무기, 대륙간 탄도 미사일, 그밖에 모든 생화학 무기를 폐기할 때만 제재를 풀어주겠다고 했다. 제3자가 봐도 북한이 이를 들어줄 것 같지는 않다. 늑대 보고 손톱, 발톱, 이빨을 다 빼고 무장해제하라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반면 판을 깨고 나온 트럼프가 특검과 연방검찰 수사, 마이클 코언 증언으로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나중에 영변 폐기만 받고 제재를 풀어줄 가능성도 제로다.

회담 결렬 후 한국정부는 아직도 모든 게 끝난 게 아니라며 희망의 지푸라기를 붙잡으려 애쓰고 있으나 이번 회담에서 보여준 양측의 입장 차이를 볼 때 트럼프 임기 내 미 북한 사이 타협이 이뤄질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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