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계는 초록병홀릭’…소주에 담긴‘역사 한 잔’

2019-02-19 (화) 정가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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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인 1인당 연간 87병 소비… 희로애락 함께한‘서민의 술’, 65년 양곡관리법 시행에 증류식 위주서 희석식이 대중화

▶ 알코올 도수 30→19도…순한술 마케팅에 여성 톱모델 등장, 경기 불황·1인가구 등 음주문화 변화로 내수 성장세 둔화

‘세계는 초록병홀릭’…소주에 담긴‘역사 한 잔’

소주는 한국인이 기쁘고 슬플 때나 언제나 옆에 있었던 ‘국민주’로 이제는 전 세계로 인기가 뻗어나가고 있다.

‘세계는 초록병홀릭’…소주에 담긴‘역사 한 잔’

지난해를 보내면서 한 잔, 새해를 맞이하는 기념으로 또 한 잔, 어김없이 오늘도 달릴 예정인가요? ’기쁘거나 화나거나 슬프거나’ 희로애락의 순간을 함께해온 서민들의 상징 소주.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20세 이상 인구 1인당 연간 87병, 일평균 1.62병을 마신 셈이다. 또 영국 주류 전문지 ‘드링크 인터내셔널(Drinks International)’ 자료에 따르면 ‘참이슬’소주가 2001년부터 2018년까지 18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술로 꼽혀 국경을 넘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기분에 따라 때론 달달하게 때론 씁쓸하게 파고드는 소주, 대체 언제부터 우리를 취하게 만들었을까?

△소주는 언제부터 서민들의 상징이 됐을까

소주(燒酒)는 한자 그대로를 풀이하면 ‘불태운 술’이라는 뜻이다. 누룩으로 발효시킨 술을 불로 때우면서 증류해 만든 특성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하지만 과거만 해도 소주는 증류의 방법이 어렵고 들어가는 곡식의 양이 많아서 아무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술이 아니었다. 역사 문헌을 살펴보면 고려·조선 시대 때는 주로 귀빈 대접용으로 내놓을 만큼 고가품이었으며 때론 병자에게 약으로 쓰인 귀한 존재였다.

해방 후 1965년 1월 정부는 식량난 등을 이유로 양곡을 원료로 하는 주류 제조를 금지하는 ‘양곡관리법’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모든 소주 생산 업체는 희석식 소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곡류를 발효한 후 증류하는 과정을 거치는 증류식 소주에 비해 희석식 소주는 만들기 쉽다는 특성 때문에 제조업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업체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가격이 내려갔다.

또 제조사들은 다양한 소비자들을 공략하기 위해 통상 30도가 넘던 소주의 알코올 도수를 25도, 23도, 19도까지 내리게 됐고 이때부터 소주는 좀 더 대중적인 술로 자리잡았다.

△바야흐로 소주 춘추전국시대

소주제조업체가 늘어나 공급량이 늘어나고 가격이 싸지면서 소비량 또한 늘었지만 주류 유통 질서가 문란해졌다.

1976년 정부는 시장 독점을 방지하고 지방 소주업계를 육성한다는 명목으로 자도주 보호 규정을 신설하게 된다. 시·도별로 1개의 업체만 소주를 생산하고 생산량의 50%를 해당 지역에서 소비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규정 때문에 1970년 200여개에 이르던 희석식 소주 업체들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자도주 법이 시행되면서 각 지방마다 대표 소주가 등장했는데 서울·경기 지방의 참이슬, 강원의 처음처럼, 충북의 시원한청풍, 대전·충남의 이제우린, 전북의 하이트, 광주·전남의 잎새주, 대구·경북의 맛있는참, 경남의 좋은데이, 부산의 C1과 대선, 제주의 한라산 등이다. 이 덕에 지역 향토 소주들이 안정적인 기반을 닦게 됐다.

그러나 1996년 자도주법이 폐지되고 다시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지역소주들도 특색에 맞춰 개발을 시작했다.

당시 소주업계에서 소주는 25도라는 공식을 깨고 너도나도 도수를 낮추면서 저도수 소주와 프리미엄 소주 등 차별화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특히 경제 성장으로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마시고 취하는 독한 술에서 즐길 수 있는 좋은 술을 찾기 시작한 소비 트렌드가 생겼다. 여기다가 지역소주들이 관광 상품성 가치를 갖게 되면서 방방곡곡 팔도소주투어가 생기기도 했다.

△소주병은 왜 초록색일까

그런데 지역에 따라 맛과 도수는 달라도 초록색만큼은 변함없이 소주의 상징이다. 맥주는 재료 특성상 갈색병에 담기게 됐지만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소주는 대체 왜 초록병에 담긴 것일까?

사실 과거에 소주병이 갈색병 혹은 투명한 시절이 있었다.

특히 증류식 소주가 주를 이뤘던 때만 해도 병 색깔은 전부 투명했다. 하지만 ‘독한’ 이미지가 강한 탓에 업체들이 점차 하늘색, 갈색 등으로 병에 색을 입히기 시작했다.

이후 1994년 당시 두산주류(현 롯데)에서 깨끗한 이미지를 내세우며 초록병에 담은 ‘그린소주’를 내놨다. 반응은? 폭발적! 1999년 당시 소주 업계 선두인 ‘진로’ 넘어서 단일 브랜드 시장점유율 1위를 달성했다.

이에 다른 경쟁사들도 앞다퉈 초록색 병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소주’하면 ‘녹색병’이란 이미지가 굳어지게 됐다.

△소주병엔 왜 여성 연예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을까

그런데 왜 소주병에는 늘 여성 톱스타들이 함께 있는 것일까?

사실 증류식 소주인 독주가 잘 나가던 시절만해도 ‘소주는 독한 남자들의 술’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소주 광고 모델은 남성 톱스타들이 주를 이었다.

1990년 이후 술 도수가 낮아지면서 독주의 이미지보단 부드럽고 마시기 편한 이미지를 어필하기 위해 각 제조업체들은 여성 스타들을 광고모델로 발탁했다.

이 때 등장한 첫 여성 모델이 바로 ‘산소 같은 여자’ 이영애이다. 이를 시작으로 김태희, 김정은, 하지원, 송혜교, 이효리, 아이유 등 당대 최고의 여자 연예인들이 소주 광고를 장악하게 된다.

할아버지 시절 독하디 독한 ‘빨간색 두꺼비’에서 20도 아래의 순한 저도주로, 또 상큼한 과일맛 소주를 거쳐 전국 팔도를 넘나들며 특색에 맞게 즐기는 지역 향토 소주열풍까지 다양한 변천사를 그려왔다.

그러나 최근엔 경제 및 인구 성장률 하락, 1인가구 증가, 주52시간제 도입으로 인한 음주문화 변화 등으로 전반적인 소주업계 성장세가 둔화하고 있다.

이 때문에 주류업체들은 최근 5년 동안 정체된 한국 시장의 돌파구로 미국, 중국, 일본을 비롯해 동남아를 주축으로 한 수출전략국가(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등까지 소주 수출량을 늘리고 있다.

100년을 넘나드는 시간동안 맛과 도수의 다변화를 통해 서민의 술로 자리매김한 것처럼 앞으로는 어떠한 전략으로 전 세계인들에게 파고들지 기대된다.

<정가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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