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삐 풀린 망아지

2019-02-19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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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1775년부터 1781년까지 6년에 걸친 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독립을 쟁취했다. 겨우 독립을 얻기는 했으나 초기 미국은 수많은 난제에 휩싸여 있었다.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의 하나가 전쟁을 하느라 끌어다 쓴 돈을 갚는 일이었다. 당시 중앙정부와 주정부가 지고 있던 부채 총액은 7,500만 달러로 당시 GDP의 30%에 달했던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중앙정부는 조세권이 없었고 13개주가 자발적으로 내는 기금에 의지하고 있었는데 이게 제대로 걷히지 않았다. 중앙정부는 ‘컨티넨털’이란 지폐를 남발하는 수밖에 없었고 귀금속으로 가치가 보장되지 않는 화폐 가치는 날로 떨어졌다. 느슨한 형태의 첫 번째 정부가 없어지고 연방헌법에 기초한 강력한 중앙정부가 들어선 것도 부채 문제 해결이 첫째 이유였다. 미국 정부의 신용 등급은 연방정부가 주정부 채무를 인수하고 조세권을 발동해 이를 갚아나가면서 대폭 향상됐다.

연방정부 채무는 그 후 50여년 동안 안정적인 상태를 보이다가 1830년대 앤드루 잭슨 때는 모든 빚을 상환, 잠시 국채가 없는 나라가 되기도 했다. 그 후 국채는 남북전쟁으로 급증했으나 전쟁이 끝난 후에는 원상을 회복했고 제1차와 제2차 대전으로 다시 급증했으나 역시 전쟁 후에는 정상으로 돌아갔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과도한 부채가 국가의 존립을 위협한다는 생각이 미국 지도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전쟁이 아닌데도 국채가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이후다. 감세를 통해 경제를 살리겠다는 레이거노믹스에 따라 1981년 대대적 감세가 시작되면서 연방정부의 빚은 급속히 늘어났다. 레이건 집권 초기 1조 달러이던 국채는 8년 사이 186%가 늘어 2조8,000억 달러가 됐다. 레이건도 그 심각성을 인식하고 1982년부터 여러 차례 증세를 단행, 세수를 늘렸다.

그 뒤를 이은 아버지 부시는 공화당 일각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채 급증을 막기 위해 세금을 인상했다 정치 생명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그 덕에 90년대 클린턴 집권 시절 연방정부는 균형재정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9.11 사태에다 이라크 전쟁 등 국방예산이 급증하면서 다시 국채는 불어나기 시작했다. 2000년 5조 6,000억 달러 수준이던 국채는 2008년 10조 달러로 증가했으며 이와 함께 국내 총생산(GDP)에 대한 국채 비율도 55%에서 68%로 높아졌다.

그 후 오바마 집권 8년간은 금융위기를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매년 1조 달러에 달하는 적자가 발생했으며 2011년에는 GDP에 대한 국채 비율이 100%에 육박했다. 전쟁상황이 아닌데 국채 비율이 100%에 달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오바마가 물러났을 때 19조9,000억 달러이던 국채가 트럼프 집권 2년 만에 22조 달러를 넘어섰다. 불황도 전시도 아닌 시기에 이처럼 빚이 불어난 것은 트럼프 감세 때문이다. 당시 공화당은 감세는 비즈니스 투자를 촉진시켜 세수를 늘려줄 것이라 주장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 난 셈이다. 2000년 이후 지난 20년의 미국 정치사는 재정적자와 국채를 늘리는 데 민주당, 공화당이 따로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눈에 보이는 국채보다 심각한 것은 ‘재원이 마련되지 않은 빚’이라 불리는 정부 약속 채무다. 앞으로 지급해야 할 소셜 시큐리티와 메디케어, 메디케이드 같은 사회복지 비용이 그것으로 소셜 시큐리티 7조7,000억 달러,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 38조2,000억 달러 등 46조 달러에 육박한다. 여기다 22조의 국채를 더하면 연방정부가 물어줘야 할 총액은 68조 달러에 달하는 것이다.

거기다 이들 비용은 평균수명이 늘어날수록 증가하게 돼 있다. 지금 비율로만 가더라도 2029년이 되면 연방정부는 이자로만 1조 달러 가까운 돈을 물어줘야 한다. 문제의 심각성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공화 민주 누구도 이에 대해 해답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해답이란 것이 혜택을 줄이거나 세금을 올리는 것인데 그럴 경우 표가 떨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하기 때문이다.

가정이나 회사나 국가나 빚이 어느 한도를 넘어가면 조직의 생존을 위협하기 마련이다. 국가 부채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달리고 있는데 이를 통제하려는 마부는 찾아볼 수 없는 게 지금 미국의 현실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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