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노예제도의 슬픈 유산

2019-02-13 (수) 남선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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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도의 슬픈 유산

남선우 변호사

랠프 노덤 버지니아 주지사는 인종차별 또는 혐오 사진이 그 자신의 의과대학 졸업 앨범의 페이지에 실렸다는 사실이 폭로된 후 사직을 촉구 받고 있다. 남북전쟁 이후 흑인들을 계속 억압하기 위해 세워진 KKK 폭력 단체는 흰 가면과 복장을 하고 수많은 흑인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이고 흑인 집들을 방화하던 조직이었다. 그 악명 높은 KKK 복장을 한 사람이 얼굴에 검정구두약을 칠한 남자와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다.

1984년이면 학교의 흑백통합이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 중 하나라는 대법원 판례가 있은 지 30년 째 되던 해이다. 그 자신도 흑백이 같이 다니는 공립학교 출신인 노덤이 20대 중반에 그런 흑인 비하 사진을 앨범에 실리게 한 것은 그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흑인들에 대한 편견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이번 사건은 미국 노예제도의 슬픈 유산이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노예들이 존재했지만 미국 독립 이전의 남부의 모든 주들에서처럼 대규모적으로 노예들을 사고팔고 하는 제도는 없었다. 1776년 미합중국이 탄생했을 때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 21명 중에서 노예를 소유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일곱 명 뿐이었다. 그중 잘 알려진 사람들로는 보스턴의 존 애덤스(2대 대통령), 역시 보스턴 출신 샘 애덤스, 그리고 뉴욕의 알렉산더 해밀턴이었다. 해밀턴은 독립전쟁 때 조지 워싱턴의 부관을 지냈고 초대 재무장관이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마운트 버논 저택에는 300명 이상의 노예들이 집과 농장을 위해 일했던 바 125명은 그의 사유재산이었다. 즉 노예들은 사람이 아닌 상품이나 재산으로 취급되었다. “만민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All men are created equal)라는 심금을 울리는 표현을 포함하고 있는 독립선언문의 저자이자 제3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퍼슨은 175명의 노예들을 소유했다. 특히 자기 딸 또래인 샐리 헤밍스와 제퍼슨 사이에는 여러 아이들이 태어났지만 그들은 제퍼슨이 아니라 엄마의 손으로 노예 신분을 벗어났다. 이것만 보아도 그의 이중성이 드러난다.

노덤 주지사의 족보에도 그의 조상들이 19세기 중엽 이전에 버지니아에 살았다면 노예 소유주들이 있었을 것이다. 1863년에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이 있었을 때는 남북전쟁이 치열하던 시기였다. 당시 남부의 수도가 바로 리치몬드에 있었다. 반 링컨 그리고 반 흑인 정서가 극심했던 곳이다.

미국 노예제도의 죄악사는 실로 끔찍하기 짝이 없다. 노예 경매장에서 매매가 이뤄지기 전에 원매자들이 노예들의 눈꺼풀로 뒤집어 보고 해 뜰 때부터 해질 때 까지 목화를 딸 건강체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팔과 다리를 눌러보는 꼴은 꼭 가축판매장에서 소를 구입하는 사람이 소를 점검하는 모습이다.

1818년 메릴랜드의 동부에서 노예로 태어났던 프레드릭 더글러스의 자서전 ‘미국노예, 프레드릭 더글러스의 일생기’ 등의 저서들은 노예제도의 비인간성을 절실하게 폭로하여 노예해방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더글러스는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엄마는 다른 곳으로 팔려가 어렸을 때 밤중에 몇 번 만난 것이 고작이다.

백인 노예소유주들이 흑인 노예들을 건드려 아이들이 생기면 백인 안주인들의 눈에는 쌍심지가 켜진다. 아이들의 엄마들은 백인 안주인들의 성화로 팔려가기 때문에 아이들은 엄마의 정을 모르고 자라면서도 아빠를 ‘주인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안주인은 혹시 자기 남편이 그 아이에게 편한 일거리를 주기라도 하면 남편을 닦달해서 그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팔도록 만든다.

여자 노예들을 건드려 낳은 아이들을 노예로 팔아 재산 증식의 방편으로 삼는 아버지들의 악마성을 더글러스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처절하게 묘사한다. 더글러스는 또한 아프리카에서 막 끌려온 노예들의 살색과 노예생활의 4~5대 지난 후의 살색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며 백인 노예주들의 죄악을 고발한다.

노덤의 고조할아버지가 농장주였다면 그는 어떤 종류의 노예주였을까. 이것을 상상해본다면 논리의 비약일까?

<남선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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