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국경장벽과 땅굴

2019-02-02 (토)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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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수선했던 40여 년 전 국무총리실 출입기자들이 ‘북한 땅굴’을 답사했었다. 그때까지 발견된 두 번째 것이었다. 한 시간에 무장군인 1만여 명을 이동시킬 수 있는 엄청난 규모였다. 북한 땅굴은 3개가 1970년대에 잇달아 발견됐고, 4개째는 1990년에 찾아냈다. 숨겨진 땅굴이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당국은 더 이상 발견된 게 없다고 말한다.

맨 첫 번째 땅굴은 서울에서 65km 지점인 연천군 비무장지대에서 발견됐다. 궤도를 갖춘 길이 3.5km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시간당 1개 연대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다고 했다.
한 시간에 3만 명이 통과할 수 있는 세 번째 것은 서울에서 불과 26마일 남짓한 판문점 남쪽 비무장지대에서 발견됐고, 맨 마지막 것은 처음으로 동부전선 양구 근처에서 발견됐다.

남북 경계선인 비무장지대에 북한땅굴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지만 미국-멕시코 국경선 아래에 뚫린 땅굴에는 족탈불급일 터이다. 북한의 마지막 땅굴이 발견된 1990년 이후에만 210여 개의 땅굴을 찾아냈다. 대부분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 오지에서 나왔다. 물론 군사적 용도는 아니다. 마약과 밀입국자 수송이 목적으로 북한 땅굴보다 규모가 훨씬 작다.


지난 한달 사이에만 3개가 발견됐다. 길이가 30~80피트로 짧고 어른이 겨우 기어갈 정도로 좁다. 하지만 지난 2016년 샌디에이고와 티와나 사이에 뚫린 땅굴은 길이가 반마일 정도나 됐고 전등과 환기장치와 궤도까지 갖춰진 ‘고급’ 땅굴이었다.

멕시칸 밀입국자와 마약밀수입자들을 막으려면 국경장벽을 쌓아야한다는 것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론이다. 하지만 전문가들 의견은 다르다. 밀입국자의 3분의2가 땅굴로 들어오거나 국경검소를 통과한다는 것이다. 또 장벽이 완성된 뒤엔 땅굴이 더 많아질 것이라며 이미 장벽이 설치된 국경구간에서 땅굴이 늘어난 것이 이를 반증한다고 지적한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수십억 달러를 투자해 장장 1,954마일이나 뻗은 멕시코국경에 철망이나 콘크리트로 담을 쌓아도 투자액을 건질만한 효과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도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 범법자들을 막는 길은 장벽뿐이라는 지론을 굽히지 않는다.

그는 국경장벽 예산 57억 달러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 예산이 통과돼도 만사가 해결되진 않는다. 장벽이 설치될 땅이 대부분 주정부나 원주민부족 또는 개인 소유다. 땅값이 훨씬 더 들 터이고, 토지수용을 둘러싼 법정소송이 트럼프 임기 내내 이어질 터이다.

국경장벽은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중국의 만리장성과 구동독의 베를린 장벽이다. 트럼프는 지난주 트위터에 “현재 전 세계에 큰 장벽이 77개 있고 45개 국가가 장벽을 계획 중이거나 공사 중이다. 유럽에서만 2015년 이후 800마일에 달하는 장벽이 세워졌고 이들 모두 100% 성과를 이뤘다”는 글을 포스팅했다. 구체적 근거는 없었다.

멕시코 국경장벽은 이미 670여 마일에 걸쳐 설치돼 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인 2006년 ‘안전 철책법’에 따라 24억달러를 들여 공사했다. 하지만 실제로 2000년부터 멕시칸 밀입국자는 계속 줄었다. 멕시코 경제가 살아났기 때문이다. 트럼프장벽이 완공될 때쯤엔 밀입국자들이 더 많이 줄어 57억달러짜리 트럼프 장벽이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른다.

“남조선 해방을 위해 기습작전을 감행하라”는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뚫린 북한 땅굴들은 써먹지도 못하고 남한의 관광자원이 돼버렸다. 진시황이 국력을 기울여 쌓은 만리장성도 군사용도와 달리 후손들에게 세계적 관광지로 물려줬다. 트럼프 장벽은 관광자원은커녕 환경파괴와 분리주의의 상징으로 지탄받아 다시 많은 돈을 들여 철거될지 모른다.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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