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붉은 선, 누구도 그 선을 넘을 수 없다

2019-01-21 (월) 이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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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렉시트 혼란’에도 몸싸움 없는 영국의회의 특별한 전통

붉은 선, 누구도 그 선을 넘을 수 없다

테레사 메이(좌) 영국 총리와 제레미 코빈(우) 노동당 대표가 지난 9일(현지시간) 정기 대정부 질문에서 발언하고 있다. 메이 총리와 코빈 대표가 발언하는 각각의 모습을 한 장으로 합쳤다.<영국의회 제공>

붉은 선, 누구도 그 선을 넘을 수 없다

영국 하원 수위관이 2016년 의회 개회식 당시 의원들을 이끌고 개회식장(상원)으로 향하고 있다. 수위관이 어깨에 이고 있는 ‘로열 메이스’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매일 의회 의장이 입장할 때 수위관이 함께 들고 온다. 로열 메이스가 의회 탁상 위에 있어야 의회는 토론을 진행할 수 있고, 의회의 결정이 법적 효력을 지닌다. <영국의회 제공>


붉은 선, 누구도 그 선을 넘을 수 없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2016년 의회 개회식장에 입장하고 있다. <영국의회 제공>


붉은 선, 누구도 그 선을 넘을 수 없다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가 자신에 대한 불신임안이 부결 된 뒤 발언하고 있다. 의회 양 쪽으로 그어진 붉은 선은 여야간 물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그 누구도 건너서는 안 된다. <영국의회 제공>


영국 의회가 15일(현지시간) 역대 최다 표 차로 메이 정부의 브렉시트 합의안을 부결시켰다. 합의안 부결에 따라 제1야당인 노동당이 테레사 메이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발의했지만 19표 차로 이 역시 부결됐다.

국운을 건 투표와 정부수반 교체를 요구하는 투표를 연이어 치르며 바람 잘 날 없는 나날들이었지만 그 어떤 의원도 ‘의장석을 점거하거나’ ‘몸싸움’을 벌이지 않았다. 의원들 발치에 그어져 있는 ‘붉은 선’을 그 누구도 넘어서는 안 되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영국의 의회는 긴 벤치형 의자가 서로를 마주보도록 좌우로 나뉘어 배치 됐다. 의회 의장의 우측에는 여당 의원들이, 좌측에는 야당 의원들이 앉는다.


토론이 과열되면 물리적 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 영국 의회 바닥에 그어진 붉은 선은 바로 이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그어진 선이다.

과거에는 ‘몸싸움’이 ‘칼싸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두 선 사이의 간격은 당시 쓰이던 검 2개의 길이와 같다. 토론 중 이 선을 넘는 의원은 의장 직권으로 퇴장을 명할 수 있다.

자리도 부족하다. 영국 의회의 의원 수는 650명이지만 회의장 내 의자에 착석할 수 있는 의원 수는 427명 정도다. 게다가 영국 의회의 좌석은 지정석이 없는 ‘자유석’ 개념으로 운영된다.

출석률이 저조한 회의 때는 모두가 앉아서 참여할 수도 있지만, 최근의 브렉시트 합의안 토론처럼 거의 모든 의원들이 참석하는 경우에는 늦게 도착한 의원들은 꼼짝없이 서서 회의에 참여한다.

의회 회기의 시작 때 국왕의 주관 하에 개회식을 하는데, 이는 영국의 3부 요인이 한 자리에 모이는 유일한 국가행사다. 군주는 하원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는 규칙으로 인해 개회식은 상원(귀족원)에서 진행된다. 귀족들이 먼저 자리하고, 후에 국왕이 입장해 하원에서 대기 중인 의원들을 소환한다.

하원 의원들을 호출하러 상원의 수위관이 직접 가는데, 하원의 독립성을 상징하는 행위로 상원 수위관 면전에서 문을 굳게 닫는다. 수위관은 자신의 지팡이로 하원의 문을 세 번 두들기고서야 비로소 입장이 허락된다.

이후 하원 수위관을 선두로 의회 의장, 상원 수위관을 비롯한 하원 의원들이 개회식장으로 향한다. 개회식에서 국왕이 전달하는 연설은 향후 회기의 국정 운영 방향을 담은 것으로 민주주의 도입 이후에는 정부내각이 대신 작성한다.

<이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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