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돈의문(敦義門)

2018-12-13 (목) 오철수 서울경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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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조선 태조 이성계는 1395년 궁궐이 완성되자 도성 축조에 나섰다.

1차 축성은 11만8,000명을 동원해 1396년 1월9일부터 2월28일까지 진행됐다. 그러나 한겨울에 공사를 서두르면서 문제가 생겼다. 장마철이 되자 곳곳에서 성벽이 무너졌다.

이에 같은해 8월6일부터 9월24일까지 2차 공사를 통해 무너진 곳을 보강했다. 사대문이 완성된 것도 이때다. 흔히 서대문으로 불리는 돈의문(敦義門)은 유교 오행사상의 서쪽 방위를 뜻하는 ‘의(義)’를 넣어 이름을 붙였다. 원래 사직동 고개에 있었는데 태종 13년(1413년) 풍수상 지기를 끊는다는 지적에 따라 남쪽으로 옮기고 이름을 서전문(西箭門)으로 고쳤다.


세종 4년(1422년)에는 자리가 높아 통행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더 남쪽으로 이전하면서 돈의문으로 바꿨다.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바로 앞이 돈의문이 있던 자리다. 이때 백성들은 새로 만들어진 문이라는 뜻으로 ‘새문(新門)’이라고 불렀다. ‘신문로’나 ‘새문안’이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곳은 중요한 관문이어서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1624년 반란을 일으킨 평안병사 이괄이 도성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곳도 돈의문이었다. 반란이 사실상 막을 내린 곳도 여기다. 잠시 조정을 장악했던 이괄 군은 도원수 장만이 이끄는 토벌군이 안현(지금의 서대문 안산)에 진을 치자 곧바로 공격했다. 반란군은 산 밑에서 공격을 하다가 사상자가 속출하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 장면을 지켜보던 백성들은 반란군이 수세에 몰리자 돈의문을 닫아버렸다. 도성에 들어올 길이 막힌 반란군은 숭례문과 마포 방면으로 도주했다.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비롯한 자객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위해 도성에 들어온 곳도 돈의문이다.

역사의 현장인 돈의문은 1915년 일제가 도로 확장을 이유로 철거해 지금은 사진 자료로만 남아 있다. 그동안 수차례의 복원 시도가 있었지만 교통난과 보상 문제로 번번이 무산됐다. 이 돈의문이 증강현실(AR) 기술을 통해 복원된다. 문화재청은 서울시·제일기획 등과 함께 국민들이 정동사거리 일대에서 AR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돈의문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을 내년 상반기까지 완료할 계획이다.

비록 디지털 복원이기는 하지만 104년 전에 사라진 돈의문을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니 다행이다.

<오철수 서울경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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