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7년만의 출타

2018-12-08 (토)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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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정 중 여러 고개를 만난다. 그것은 인생고개요, 성장발달 과정으로는 생애주기가 변화하는 시기이다. 이를 잘 넘어가려면 그 동안 굴러오면서 해졌을 바퀴를 갈아 끼워야 한다. 바퀴를 갈 때가 일을 그만둘 노년기일 때 사람들은 이를 은퇴라 부른다.

은퇴는 노화와 같은 생의 발달단계의 한 정거장이요, 삶의 한 단계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은퇴가 끝인 줄 알고 불안, 외로움, 고립감의 부정적 감정에 휩싸인다. 더 나아가 생산성 결핍은 사회적 생물학적 역할의 상실감을 불러 정체성 혼란과 존엄성 위축으로 우울감, 무기력감, 패배의식의 늪에 빠져들게 한다.

은퇴생활을 잘 하는 듯한 사람들도 속으로는 옛날의 자기로 돌아가고 싶은 경우가 한 둘이 아니다. 따라서 은퇴가 자신의 삶에 무슨 의미를 주는가를 잘 생각하여 은퇴 후 생활에 적응하는 게 개인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아주 중요하다.


흔들거리는 그네, 어두운 골목의 갈림길 …그런 위태롭고 희미한 경계선에서 “이게 아닌데” 도리질하며 7년을 보냈다. 그 동안 여행, 자원봉사, 그림공부, 수화통역, 수영, 요가 등 닥치는 대로 맛을 보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일에 대한 욕망과 애착, 그리고 사랑과 일이야말로 인간 삶의 목적이라 했던 프로이드 선생 말이 웅크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더구나 매일 직장알선 회사에서 보내오는 일자리 이메일의 유혹을 견뎌내는 힘도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빌미를 내세워(정신과적으로는 ‘내적 투사기전’) 일터로 다시 나온 게 지난 10월 초순이었다.

7년 전 더 이상 정신병 환자들 보기가 너무 피곤하고 역겨워 그만 두었지만 다시 환자를 보게 된 것이다. 어느 고등학교 선생이 칠판의 분필가루가 지겨워 은퇴한 후 석 달도 못돼 분필가루가 그립더라는 것처럼 그냥 환자를 보고 싶어서 일을 하고 싶어서 나왔다.

일을 시작하던 날 아침 문득 ‘7년만의 외출’ 영화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지하철 입구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들쳐진 치맛자락을 움켜진 천진스럽고 당혹스런 마릴린 몬로의 모습이 다시 의료전선에 나선 내 자신의 양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전쟁터에 내보내진 애송이 병사처럼 두려움이 엄습했다. 45년 전 수련기간을 마치고 정신과 의사가 될 때는 피부색, 습관, 문화가 다른 사람들을 과연 치료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는데, 지금은 모든 의료기록, 처방 등을 손으로 쓰는 게 아니라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야 하는 두려움이다.

20대 후반 남성이 어머니 손에 이끌려 진료실로 들어 왔다. 아들이 혹시 사람을 해칠까 염려되어서란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아래 위층 사람들이 떠들면 아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주먹을 불끈 쥐고 화를 내며 싸우러 갈 채비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사훌에 한 번씩 일어나 가족들이 말리면 아들이 공격적 폭력적 행동을 보였다.

20대 중반까지는 직장 일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데이트도 했던 아주 정상적 청년이었다. 그런데 5-6년 전 갑자기 다 그만두고 집안에만 틀어박혀서 혼자 중얼거리다가 가끔 TV 보는 게 그의 일과이다. 술 담배 커피도 안하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 예민해져 신경질을 냈다.


밖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만 있고 싶은 증상을 보이는 정신질환 중 심한 주요 우울증, 공황발작으로 인한 광장공포증, 양극성 장애의 우울시기, 정신분열병이 떠오른다. 우울증이나 양극성 장애나 광장공포증은 아닌 것 같다. 그러면 정신분열증?

환각, 망상 증세가 있으면 진단은 비교적 쉬워진다. 그러나 환각이나 망상이 없다고 정신분열증이 아니라고도 단정 못한다. 환각, 망상, 비조직적 언어(말수가 적고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의 앞뒤가 맞지 않는 언어),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이상한 행동(공공장소에서 혼자 낄낄거리거나, 허공에 손을 내저으며 걷거나, 사소한 일로 행인에게 시비를 걸어 공격적 행위를 하는 등), 정서표현의 부적절함(기쁜 일에도 슬픈 일에도 표정이 거의 변하지 않고, 장례식장에서 크게 웃고 떠드는 등), 무의욕, 무기력, 무관심 등(직장을 구하거나 친구들과 유대를 맺고 싶은 욕망과 동기가 없고 무관심으로 현실세계와 단절한 채 자신만의 세계에서 생활) - 이들 증세 중 최소 2가지 이상이면 정신분열증을 의심한다.

정신분열증 가능성 진단을 내려 소량의 항우울제 처방과 환자를 서서히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정신사회 재활치료를 권장했다. 결과는 두고 볼 일이다.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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